“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사도행전 1:6-7).
1. 성경에 나오는 동문서답 중, 아마도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위의 구절일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도, ‘민족의 독립’만을 ‘메시아의 구원’으로 생각하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또 우문을 던진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시점, 이때에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그리고 성서가 계시한 ‘메시아’의 의미를 제자들이 깨달았으리라 기대했던 터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질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여전히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들은 ‘우리가 독립을 위해 일어날 때가 지금입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을 피하시고,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원하는 자기들의 나라의 회복이 아니라, 모두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때를 일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는 것이다(사도행전 1: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회복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직접적으로 일러주시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오순절의 역사를 겪은 한 참후에야 비로소 ‘회복해야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사도행전 11:17-18).
2. 9.11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이유 없이 죽었을 때만 해도, 사건이 터지자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하는 미국인들을 보았을 때만해도, 교회에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미국인들과 함께 기도할 때만해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알카에다를 소탕한다며 쳐들어가서 부수고 뒤지고 할 때만해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 외곽으로 진입하고도 십년이 지난 오늘, 제쳐두었던 한 가지가 뇌리를 스쳤다. 과연 기독교인이 결과론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다.
지금 끝나지 않은 이라크 전쟁의 아픔은 우리에게 2003년 미국이 전쟁을 정당화한 결과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이라크와 벌이는 일방적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강경파든 온건파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타당한 명분과 절차를 갖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사담 후세인을 폭군(tyrant)이라고 부를 때, 미국인들은 영미전통에서 ‘자유’(freedom)란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비(非)지배' (non-domination) 원칙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미국은 주권을 가진 다른 나라에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국제법과 민주적 절차를 무시했고, 전쟁이 시작될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이라크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미군과 영국군을 환영하는 이라크 사람들, 구호물자를 앞 다투어 가져가는 사람들을 텔레비전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한 전쟁의 정당성을 결과적으로 찾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았다. 이라크 전쟁은 단지 미국인들의 안전, 자기들이 상상한 위협(self-imagined threat)으로부터의 해방되고자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인권 단체들도 이왕 일어난 전쟁이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는 주장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이 몰락한 후, 기대했던 것들 중 어느 것도 실현된 바가 없다. 이라크가 실제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라크 인들이 미국이 주도해서 세운 새 정부는 여전히 반발과 무능력 사이를 헤매고 있으며, 이 전쟁은 힘이 곧 생존인 ‘정글의 법칙’이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을 뿐이다. 만일 미국이 석유를 놓고 독재와 타협하려 했지만 여러 번 기만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했다면 오히려 솔직했을 것이다. 성경말씀으로 자기의 주장을 치장했던 부시 대통령의 수사도 인간적 욕망에서 비롯된 환상이었음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3. 구약에서 민족(nation)으로 번역되는 ‘고이’(gowy)는 ‘족속’과 ‘하나님의 약속’이 합해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주권이라든지 정치체제와 같은 의미를 찾기는 힘들어 보이는 것이다. 역사적 공통성이나 혈연적 동질성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아브라함의 핏줄이 기준이라면, 이스마엘의 자손들도 같은 민족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만을 구별하여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에 상응하는 축복을 기준으로, ‘이방인’과 ‘우리’를 구별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민족'이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보다 ‘이방인’을 지칭할 때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구별의 기준이 인간적인 잣대가 아님을 반증한다. 즉 구별의 기준은 ‘하나님의 눈’이라는 것이다 (시편22:27). 통일 유대의 왕 다윗에게도 따져보면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도 이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기준을 핏줄로, 약속을 선택으로 이해해서 만들어낸 인간적 의도, 즉 차별과 구별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한 인간적 욕심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민족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ethnos’다.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natio와 유사하게 삶을 공유하는 집단 또는 족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어다. 민족의 고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근대 민족국가 이전에 형성된 정치적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민족성’(ethnicity)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방인 누가는 이 단어를 우선 유대인과 기독교 ‘이방인’(Gentile Christian)을 구별할 때 사용한다(사도행전 10:22 & 10:28). 그러나 이런 용례는 지속되지 않는다. 베드로가 “각 나라(pas ethnos)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는 말을 한 이후(사도행전 10:35), 이 단어는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지칭하거나 관계없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용례는 ‘민족’이라는 기준보다,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의 여부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지’의 여부가 중요한 잣대가 됨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신약의 민족관은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고난과 위로를 받으면 모두가 같은 민족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끝없는 민족분쟁과 공격적인 애국심이 기초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에서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출애굽기 22:21, 23:9, 예레미야 7:6),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언 22:22), 고아와 과부를 두둔해 주라는 (이사야 1:17) 말씀을 본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고,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기 위해서" 일어난 정의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이사야 58:6). 그러나 이기심과 지배욕에 이끌려 타인과 우리를 구분한다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무한 결과로 우리 모두를 가르치실 것이다(로마서 3:29).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힘'의 면류관(stephanos)만을 받아쓰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는 ‘흰 말을 탄 사람’같이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있다면, 그 무엇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한계시록 6:2).
4. ‘결과가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말이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일들이다. 따가운 태양 때문에 벌어진 땀구멍으로 최루탄 가스가 들어가서 온통 물집이 생긴 일, 가로투쟁을 가며 두려운 마음에 선배의 대수롭지 않은 영웅담을 애써 기억해 내려고 한 일, 종로와 동대문 뒷골목을 이를 악물며 도망 다니느라 허리춤에 넣어둔 유인물들이 땀으로 흠뻑 젖은 일, 닭장차에서 친구와 함께 두들겨 맞은 일들이 꿈속에 나타난다. 이런 과정에서 어쩌면 ‘힘’(power)이 지배하는 세상을 무의식중에 배웠을 수 있다. 혹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배운 나쁜 버릇들이 상식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그 과정을 보고 성장한 우리는 더욱 조심스럽게 ‘결과’에 모든 것을 맡기는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 한다. 우리가 과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민주적 의사수렴이 무의미하다는 속삭임에 순응할 때, ‘힘’을 통해 야망을 달성하고 ‘권력’을 통해 만족을 취하는 세대의 출현을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차이를 극복할 매개체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면, 설사 총부리를 맞들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갈등을 순화시키고 선한 일로 함께 나아갈 그 무엇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 바로 사랑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도,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도,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계기와 이유가 있다. 그러기에 때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기독교인들이 지나치게 애국심에 천착하는 태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남다르게 강한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독립과 근대화 과정을 함께 걸어온 기독교, 그리고 분단을 통해 큰 고통을 감수했던 교회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을 성경에 기초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정리할 시점은 아닌가 생각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 Diagog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