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대를 저버리는 불량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기술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현대인의 관대함은 여전한 것 같다. 특별히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혼자 생각이지만 영화에서 너무 발전된 기술을 많이 접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 발전된 기술이 아니라 거의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의 기술을 수없이 선보이는 영화들도 많다. 전에 어떤 영화를 보면 해상도가 나쁜 사진을 확대해서 고해상도의 사진을 만들어 범인의 얼굴을 알아내던가 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이건 없는 정보를 만들어 내는 수준이니 어느 우주에서도 불가능한 기술이다. 그만큼 불가능한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얼마 전에 투명 망토 어쩌구 하는 기술도 신문에 많이 소개됐었는데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투명 망토와 비교하기엔 너무나 원시적인 수준의 기술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모 영화의 투명 망토를 언급하며 벌써부터 이런 망토를 입고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사람들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일부 사소한 기술적 걸림돌만 제거하면 곧 시장에서 이런 망토를 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동작 사진까지 덧붙여 가며 실현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마치 18세기 사람이 바람 빠진 풍선이 날아가는 걸 보며 이제 달에 갈 로켓 쏘아 올릴 날도 며칠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둘 다 같은 원리니까 말이다.
인공 지능의 측면을 봐도 마찬가지이다. 인공 지능, 혹은 인공 지능을 겸비한 로봇은 시간 여행과 가상현실과 더불어 SF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제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SF 영화 캐릭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2001년 우주여행의 HAL과 AI(제목부터 인공지능이다)의 주인공 로봇 데이빗이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선보이는 똑똑한 컴퓨터나 로봇과 현실에서 실제 진행되고 있는 기술 개발 사이의 괴리는 정말 극복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과하고 사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로봇들이 우리 일상생활 속에 등장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하니 나를 러다이트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결코 인공지능 기술을 매도하거나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분명 인공지능 기술은 낮은 해상도의 사진을 100배 확대해서 작은 종이쪽지에 쓰인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따위의 불가능한 기술보다는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람의 뇌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공두뇌로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등의 철학자들의 논지도 전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류의 주장 중에 꽤 자주 인용되는 것 중에 존 설의 중국어 방이라는 사고실험이 있는데 여기서는 인공 지능을 중국어를 전혀 모르면서 한자라는 기호를 조작하는 규칙만 익힌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그 사람은 닫힌 방 안에 있다가 중국어가 적혀진 쪽지가 들어오면 적당히 기호를 조작하고 변환해서 마치 중국어를 이해해서 해석한 듯한 답을 준다. 하지만 인공 지능이 이런 수준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호프스태터가 그의 책 ’마로의 아름다운 시(Le Ton beau de Marot)'에서 지적했듯이 인공지능의 기계적인 측면을 인공지능 전체와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에 대한 통찰을 준다고 보기는 어려운 예이다.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다른 주장들도 마찬가지인데 대부분 논리적 근거가 없거나 혹은 아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요점을 찾기가 어려워 그냥 인공지능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모호한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호프스태터 자신도 물론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 연구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두뇌의 비밀이 2,3십년 수준의 시간 안에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생각처럼 그 과정은 적어도 2,3백년은 걸리는 작업이고 그 만큼의 시간 후에 나타난 결과는 지금의 인공지능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것이다.
무한의 문제 조금만 더
무한의 문제를 유한한 지면에서 다루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쉬움을 조금만 덜기 위해서라도 앞글에서 다루지 못한 무한의 측면을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 번째는 무한의 존재여부이다. 우주의 크기가 무한이라면 당연히 무한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긴 하지만 그래도 유한한 크기라면? 만약 연속이 존재한다면 이때도 쉽게 무한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속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적어도 우주 안에 표현 가능한 형태는 유한할 것이다. 만약 표현 가능한 가장 큰 수를 보며 그 보다 하나 더 큰 수를 상상할 수 있을까? 단순히 ’표현 가능한 가장 큰 수보다 하나 더 큰 수'라는 것은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데 실제 어떤 수를 지정할 수 있을까?
무한은 수학에서는 일상적으로 다루는 주제이기 때문에 그 존재 여부를 따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학적 논지와 그 논지의 현실에서의 적용 가능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의 예를 들자. 아르키메데스는 기다란 지렛대와 자신이 서 있을 자리만 있으면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산술적으로 봤을 때 지렛대의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한 쪽이 다른 쪽보다 길면 그 길이의 배수만큼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한쪽이 10미터이고 다른 쪽이 1미터라면 (비대칭적인 시소를 생각해 보라) 100킬로그램 밖에는 들어 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1미터인 쪽에 물건을 올려놓고 10미터인 쪽 끝을 누르면 1000킬로그램짜리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지구의 무게가 사람이 들기에는 워낙 무겁기 때문에 엄청나게 긴 막대가 필요할 것이다. 사람이 들 수 있는 무게에 비해 지구가 몇 배 무거운지를 따져 보면 필요한 막대의 길이도 비례식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대충 계산해보면 그 막대의 길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최소한 10배는 되는 길이이다. 말도 안 되게 긴 막대지만 사고시험에서 그 정도는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막대가 휘지 않는다는 가정이 들어 있다. 애당초 워낙 길이가 길기 때문에 자기 무게를 못 버티고 휘어 있을 테니 막대의 무게가 0이라는 추가적인 가정도 필요하다. (우주 공간에서 하는 실험이기 때문에 무게가 어차피 0이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주 공간이라면 지구도 무게가 없기 때문에 실험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이 실험은 지구와 비슷한 중력이 작용하는 엄청 넓은 가상의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고실험이니 그런 가정까지 봐준다고 해도 휘는 막대를 통해 얼마나 힘이 전달될지는 미지수이다. 어쨌든 애초에 생각한 대로 직접적인 형태의 힘의 전달이 아니라 파동과 같은 뭔가 다른 형태로 힘이 전달될 것임은 틀림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막대를 지탱하는 축에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힘을 주었을 때 축(또는 시소처럼 만들었다면 받치는 기둥)이 휘거나 쭈그러든다면 이는 힘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 막대의 한 쪽이 훨씬 길기 때문에 힘을 받았을 때 이 기둥이 1 미리 수축한다면 막대 한쪽 끝을 은하계의 크기만큼이나 움직여도(이보다 훨씬 큰 거리일 수도 있다) 반대쪽으로는 힘이 하나도 전달되지 않게 될 것이다. 막대가 휘거나 물건이 수축한다든가 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장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고 실험에서 고려할 필요는 없는 부분이라고 말이다. 앞에서 우주보다 훨씬 큰 막대나 무게가 거의 0인 막대라는 가정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나? 그러나 휘지 않는 막대나 수축하지 않는 물체를 가정하는 것은 엄청 긴 막대나 엄청 가벼운 막대라는 가정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다. 엄청 긴 막대나 엄청 가벼운 막대는 당연히 가능하지 않은 가정이지만 그 가정에서 논리적인 모순을 찾기는 어렵다. (분명 논리적인 모순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내 능력으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지식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휘지 않는 막대나 수축하지 않는 물체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간단한 가정에서 유도되는 논리적인 귀결이다. 빛의 속도가 일정한 우주에서는 막대는 휘고 물체는 수축할 수밖에 없고 휘지 않는 막대를 가정하는 순간 우리는 빛이 여러 다양한 속도를 가지는 우주를 새로 만들어 내야 한다. 따라서 휘지 않는 막대란 가정은 우리 우주에서는 불가능한 가정이다. (아마 어떤 물리법칙이 적용되던 불가능하고 따라서 어떤 우주에서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내가 증명하긴 어려운 사실이긴 하다.) 휘지 않는 막대의 가정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례식을 이용한 단순한 수학적 상황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내 능력으로 무한의 존재에 대한 더 이상 얘기를 하기 힘들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존재 여부를 따지는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문제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 바로 ’자연수보다 개수가 많고 실수보다 개수가 적은 무한이 존재할까?’하는 문제인데 힐베르트가 1900년을 맞아 제시한 수학의 23개 문제 중 하나이다. 자연수와 어떻게 짝을 지어도 수가 남고 실수와는 어떻게 짝을 지어도 전부 맞는 짝을 찾을 수는 없는 그런 수의 모듬이 있을까? 라는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정확히 밝혀졌다. 그런데 이 세상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이 다 그렇듯 그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맞는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고 틀린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상식적이란 말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수학적 상식을 말하는 것으로 수학의 기반이 되는 정형화된 집합론의 기반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그냥 두 모듬의 짝을 맞추어서 개수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봐도 된다. 앞에서 다룬 수준의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약간 찜찜한 답변이기는 하지만 이런 문제는 괴델의 불완전성을 다룰 때에 또 등장할 것이니 여기서는 간단히 맛만 보고 지나가기로 하자.
이번엔 진짜로, 수준(또는 레벨, 또는 계층)의 문제
호프스태터는 ’마로의 아름다운 시'라는 책에서 존 설의 중국어 방의 비유가 전형적인 ’계층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계층의 혼란은 인간의 의사소통에 필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짐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말을 보자. 말에는 음파로서의 물리적 수준, 단어나 문법 등의 언어적 수준 외에 문화적, 심리적 수준 등 다양한 수준의 요소들이 뒤죽박죽 얽혀져 있다. 사람이 어떤 말을 들을 때 이런 수준들은 종합적인 반응을 일으키는데, 예를 들어 그 물리적 특성인 주파수의 변화에 따라, 그러니까 음성의 높낮이에 따라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은 또 이성적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면 컴퓨터가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는 각 계층이 명확히 정해져 있으며 계층이 엉키면 통신은 불가능해진다.
컴퓨터 통신을 처음 배울 때 등장하는 것 중에 OSI 7계층 모델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컴퓨터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각 계층을 정의하고 있는 모델이다. 이는 다음의 일곱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응용 계층
표현 계층
세션 계층
전송 계층
네트워크 계층
데이터 링크 계층
물리 계층
자세한 내용을 알 필요는 없지만 사람이 말을 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왜 계층을 나누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통신을 아주 단순하게 보면 다음과 같은 계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의도의 계층
언어의 계층
음파의 계층
내가 친구에게 ’안녕'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1)안부를 묻는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2)안녕이라는 단어가 전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자연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3)음성이 음파의 형태로 한 사람의 성대에서 다른 사람의 고막을 통해 청각신경으로 전달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컴퓨터 통신도 마찬가지로, ‘수준의 문제'라는 글자가 당신의 컴퓨터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수준의 문제'라는 글자를 담은 정보는 여러 계층을 거쳐 물리적 신호 (전기 신호 또는 빛 신호 또는 전파)로 바뀌어 져서 전달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을 그냥 ’안녕'이라고 말했다고 하면 되지 그것이 어떻게 음파로 바뀌어 전달되는지를 일일이 따질 필요 없는 것처럼 컴퓨터 통신에서도 언급하고 싶은 계층에서의 이야기만 하면 되지 일일이 물리적 신호에 대한 얘기를 곁들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수준의 문제'라는 글자열이 아포리아 서버에서 당신의 컴퓨터로 전달되었다는 말은 OSI 7계층의 최상위 계층인 응용 계층의 수준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와이파이 신호가 약해서 웹 페이지가 잘 뜨지 않는다 라는 말처럼 최하위 물리 계층(와이파이 신호)과 최상위 응용 계층(웹페이지)을 함께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계층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는 계층 간의 괴리를 워낙 본능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잘 극복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접하는 언어를 공부할 때에는 문법이나 단어 선택 등 기본 적인 언어 규칙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만 모국어를 말할 때에는 거의 그런 고민 없이 본능적으로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반면 컴퓨터에서는 각 계층이 명확히 구별되어 처리 되며 한 계층을 담당하는 컴퓨터 모듈(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에서는 절대 다른 계층의 기호를 해석할 수 없다. 사람이 휴대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접하면 두통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설령 남자 친구에게 보내는 달콤한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들 다를 바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끼리 소통에 해당하는 계층은 앞서 소개한 컴퓨터 통신의 계층의 최상위 계층보다 상위에 위치할 것이다. 결국 컴퓨터 통신 자체를 사람 간의 통신을 위한 하나의 미디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간의 통신도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계층이 아니라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에서처럼 간단히 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언어의 계층 하나만 봐도 철자, 음절, 단어, 문법 등의 계층으로 나무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최상위에 존재하는 계층은 ’의미의 전달'이라는 계층일 것이다. 보통 상위에 위치한 계층은 하위에 위치한 계층의 ’내용물'로 볼 수 있고 하위에 위치한 계층은 상위에 위치한 계층의 ’용기'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말로도 바꿔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내용과 형식의 문제는 하나의 용기에 담긴 하나의 내용물과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다단계 용기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가장 안쪽에 위치하는 것이 아마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궁극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고 여러 단계의 용기 자체가 전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결국 껍데기를 다 까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양파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최상위 계층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계층을 의미의 전달의 계층이라고 불러 보자. 물론 그 위에도 계층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그런 가능성은 일단 접어두고 우리가 정한 계층을 최상위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최상위 계층에서 의미를 보내는 송신자와 수신자가 있을 것이다. 이런 대상들을 통신 ’주체'라는 말로 부르고 싶지만 주체라는 말이 워낙 심각한 의미를 담고 남용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제하기로 하겠다. 이런 궁극적인 송신자와 수신자 간에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물론 하위의 모든 계층이 역할을 해주어야 하고 이런 역할을 맡은 대상들에는 인체 기관 (발성 기관과 청각 기관, 근육과 시각 기관 등 외부와 연결된 모든 기관이 이에 해당된다), 물리적 현상 (빛, 음파, 전파 등), 통신 수단 (글자 체계, 글자를 적는 연필과 종이, 컴퓨터 통신망 등) 등 온갖 상상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렇지만 최상위 레벨만 보면 그냥 송신자에서 수신자로 의미가 전달된다 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고 이 계층 보다 아래에 위치한 것들에게는 상위 계층에서 다루는 의미란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다시 살펴보자. 바벨의 도서관의 책들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 연애 성공의 비결을 담고 있는 책이 있고 주식 투자에 성공하는 비결을 담고 있는 책도 있다. 잘 살펴보면 서울대 가는 법이 쓰여 있는 책도 있을지 모른다. (이런 비결들이 책에 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에 사실은 없겠지만 여기서는 보르헤스의 가정을 따라 모든 진실이 책에 담길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바벨의 도서관이 모든 가능한 철자 조합을 다 포용하고 있다는 간단한 가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래, 그렇다면 그런 책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럼 그런 책을 찾을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그 책의 위치를 찾는 것 이상의 문제이다. 그 책의 위치를 찾았다 해도 그 책을 해석하고 그 책에 정말 진실이 쓰여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상위 계층에서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그 책을 발견한다 해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 것이다. 원숭이 여러 마리에게 타자기를 주고 무한정 기다리다 보면 셰익스피어 급의 희곡이 등장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가설도 마찬가지이다. 원숭이들은 하나의 타자키만 반복적으로 두들겨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사실 우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희곡 하나 커녕 의미 있는 문장하나라도 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정말 다양한 키를 무작위로 두들겨댈 능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문제는 단순한 확률의 문제로 볼 수 있고 언젠가는 셰익스피어 급의 희곡이 나오는 날이 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주가 몇 번이나 그 생명을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긴 하겠지만) 그렇다면 셰익스피어가 없이도 셰익스피어 급의 희곡이 나올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만약 원숭이들이 쓴 글을 읽고 그 글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없다면 원숭이들은 햄릿을 능가하는 희곡을 쓰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타자기를 두들겨 대는 일을 할 것이다. 원숭이들이 작업을 어느 시점에서 끝내기 위해서는 이미 쓰려하는 글이 존재해서 그 글과의 기계적 비교를 통해 똑같은 글이 나오면 멈추게 하거나 (하지만 이미 그 글이 존재한다면 원숭이들까지 동원해서 이런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원숭이들이 쓴 글을 최상위 계층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원숭이들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렇듯 하위 계층에서는 자신이 다루는 것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상위 계층에서는 하위 계층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상위 계층 간의 통신에서는 물론 하위 계층의 문제가 관심이 없다. 우리가 전화를 할 때 그 내용이 어떻게 전파로 바뀌는지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관심 대상 자체가 하위 계층이라면 어떨까? 계층 간의 장벽을 허물고 하위 계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연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이 바로 그런 대상 아닐까?
계층의 문제는 워낙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고 책에서도 길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번 편에서 마무리 짓기는 힘들 것 같다. 다음 편에서 다른 시각을 소개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에도 이런 계층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 과학적 진리의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 2015년 1월, 이상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