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7-07 17:22
삶의 여정 속에서 (10): 흔적에 대하여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5,536  


삶의 여정 속에서 (10): 흔적에 관하여

1. 삶의 흔적은 해석의 영역이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문득 자신의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게 된다. 삶의 흔적이란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 오롯이 새겨져 있는 그 무엇이다. 흔적은 현상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 이태리 선수의 어깨에 새겨진 이빨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그 흔적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다시 고개를 들고 나타날 것이다. 총리 인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도 이제는 정치사의 혼란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어떤 이에게는 지우고 싶은 그 무엇이고, 어떤 이에게는 살리고 싶은 그 무엇이다. 그러고 보면 흔적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은 늘 우리 삶의 주위를 맴돈다. 흔적은 사실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영역에 속해 있기도 하다. 아무 의미 없이 새긴 흔적조차도 그 시간과 그 공간을 벗어나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콜라 병을 보고 부시맨은 신의 선물로 해석하였다. 우리 삶의 흔적들도 그러하다. 오래 전에 무심코 흘린 나의 말 한마디가 자신의 인생에 큰 의미와 위로가 되었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물론 나는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살아가는 모습 한 조각, 말 한 조각이 우리 주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그 시점에서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삶의 작은 흔적들을 통해 우리의 이웃들은 희망을 발견하거나 큰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 이웃들은 항상 내 삶의 흔적들을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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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랑천; 흔적의 해석] 버림받은 자인가 자유낙하한 자인가?

2. 흔적은 시공간의 좌표이다.

우리의 일상 하나하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흔적으로 남는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그 공간 속에 흔적을 남겨두고 떠난다. 남겨둔 흔적들은 기억 속에 갇혀있지도 않고 기억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실존하며 그 행위의 주체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물론 오랜 기간 가만히 참고 기다리기도 한다. 누군가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며, 이러한 특성 때문에 문득문득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심리적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요즘처럼 정보가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시대에는 심리적 두려움은 한층 배가된다. 암울한 상상일 수도 있으나, 미래에는 개인의 삶의 흔적들이 모두 기록되고 정부나 기업의 서버에 저장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벌써 그런 조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길거리와 도로를 24시간 감시하는 검은 눈동자들은 우리의 동선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한다. 인터넷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흔적들은 서버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모든 전자기기를 연결하는 연구들도 많이 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 할 집에서 조차 우리는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흔적을 남겼는지 엔터키 한번만 누르면 다 알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 그런 세상이 되면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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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한강시민공원의 낙조] 흔적은 좌표이다.

3. 흔적과 함께 살아가기

우리는 또한 보여 주고픈 흔적과 숨기고 싶은 흔적의 불일치에 속에 살아가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들 속에서 살아갈 용기도 필요하다. 우리는 온전한 성자가 아니므로. 시공간의 좌표 속에 존재하는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므로 차라리 그대로 응시하는 편이 현명하다. 어떤 흔적들은 거미줄과 같아서 한번 걸려들면 빠져 나오기 어렵다. 발버둥 칠수록 더 단단히 묶여 들어가 심리적인 공황상태로 빠져들기도 한다. 흔히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럴 때는 그저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시공간의 좌표에 그 흔적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의 흔적들을 돌이켜 보면 삶의 방향을 재설정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 흔적들이 불쾌하든 유쾌하든 간에. 따뜻한 마음으로 과거의 어느 공간 속에 남겨진 자신만의 흔적들을 보살피고 가꾸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흔적들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훌륭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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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섬] 흔적들과 함께 살아가기

인생은 짧고 흔적은 길다. 예수님의 흔적들은 그 제자들이 물려받았고 비바람에 바위가 사라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인류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짧은 나의 흔적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두렵고 궁금하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7, 2014년 7월, 이재호, SK 이노베이션 글로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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