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일각수의 꿈)이 군대에서 복무 중인 리씨를 매료시켰다. 군 입대 전에 이렇다 할 독서의 취미가 없었던 리씨는 스스로 책을 완독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한 꼭지씩 번갈아 가면서 나란히 진행되는 구조이다. 두 개 중 하나인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미래의 어느 지점에 ‘계산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머리에 계산기 칩을 이식하여 회계나 세무 등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것을 전적으로 해결해 주는 직업적인 존재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실험적으로 머리에 넣고 작업에 임하던 중 기계적 오류로 인해서 계산사는 자기의 두뇌 속 관념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탈출구를 찾는 몸부림과 여정이 바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얼개이다. 두 이야기 중 또 다른 하나인 ‘세계의 끝’은 어떤 신비감을 주는 폐쇄적인 장소의 이야기이다. 마을에 병영, 도서관, 늪지 등은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고, 일각수 무리가 이동한다던가 하는 풍경은 더욱 초현실적인 인상을 주면서 기묘하게 노스텔지아를 불러일으킨다. 독자는 두 챕터를 번갈아 읽어가면서 이 두 세 개가 만날 것이라는 암시와 기대를 갖게 된다. 이 폐쇄적 장소에 갇힌 주인공과 초현실적 풍경이 펼쳐지는 이 판타지는 군대라는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일상을 발버둥 치듯이 반복하는 리씨의 상황과 무척 닮아서 도착적인 사실감을 주었다. 관념 안에 실존이 갇힌 것을 이렇게 구조화 하다니. 하루키의 숨막히는 디테일은 그런 판타지의 사실성을 피부로 와 닿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지도
이 소설의 첫 페이지에는 양면 전체로 펴서 볼 수 있는 지도가 그려져 있다. 미술대학을 다니다가 군에 온 터라서 리씨에게 그 지도는 큰 인상을 주었고, 소설을 읽는 내내 묘사된 책 앞의 지도로 가서 공간 속을 거닐 듯이 구석구석 눈으로 살폈다. 지도 그림의 시각적인 인식과 이야기 속 서사의 상상력은 문장과 지도를 오가면서 시실과 날실처럼 얽혀서 어떤 현실감을 직조했다. 그러나 소설의 계산사가 갇힌 세계에서 빠져 나오면서 두 이야기가 합쳐지듯이, 리씨의 군생활도 책과 함께 출구가 보였다. 지도 속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일각수 두개골에 갇힌 꿈처럼 군대를 제대하고 바깥 세상에 나온 후로는 판타지가 리씨의 관심 밖으로 서서히 밀려나 봉인되었다.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실존주의 소설, 국내 소설 등 판타지보다는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정황이 나오거나 주인공의 실존적인 고뇌가 엿보이는 것들이었다. 이 시기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한국에서도 한국근대문학의 종언 논쟁이 뜨거웠다. 리씨도 당시 가라타니 고진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소설을 오락물로 치부하고 그런 가볍고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오락물들은 현실의 진정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겼다. 리씨는 그 책을 잊을 정도로 바깥세상에 있을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되었던 ‘현실’에 매진하게 된다.
현실의 틈
리씨가 그 책을 다시 떠올린 것은 미대를 졸업하고 공공미술 현장을 전전하다가, 자신이 살았던 곳에 돌아가서 활동할 때였다. 공공미술은 재미와 보람 못지않게 피로감도 주었다. 개인적인 작업을 넘어서 사회 속에서 참여자들과 결부된 활동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지원금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은 한시적이고,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여 지나치게 타협적인 성향이 있었다. 참여했던 프로그램이 일단락되어 잠시 쉬고 있을 때 그의 동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방학동에서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데 놀러오라는 내용이었다. 뭐? 방학동... 아뿔사 그곳은 리씨가 과거 14년간 살았던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그는 인기있었던 근래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쌍문동 옆 동네인 방학동에 초등학교 3학년에 전학 와서 군에 입대할 때까지 살았다. 리씨는 그곳에서 7년간 활동하게 된다. 소위 ‘공동체 예술’에 매진하면서 공간 안내 리플렛에 삽화로 지도를 그리게 되었을 때 예의 일각수의 꿈의 앞에 실린 삽화가 어렴풋이 떠올랐고 다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되돌이
리씨에겐 묘한 습성이 있다. 한 번 본 것을 시간이 얼마만큼 흐른 후에 다시 더듬어 보는 습성인데,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기억에 관련한 습성과 연관된 것인지 자신만의 특별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에서 학교는 십리 바깥에 떨어져 있었는데, 또래가 별로 없던 리씨는 하교 길에 혼자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산만하면서도 골똘한 그는 돌아오는 길에 눈에 띄는 돌이나 나뭇가지 등 길 위의 표식을 인상 깊게 보면 지나치다가 뒤돌아서 다시 거기로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다시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놀이라 보기에는 지겹고, 어쩌면 두려운 것이다. 그 행위에 끌리면 집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벗어나다가도 다시 그 돌이 있는 곳에 뒤돌아가 확인하는 묘한 행위. 프로이트가 어린이의 ‘포르트 다’ 놀이에서 어떤 보편적인 발달 심리의 표본을 추출했듯이, 리씨는 어릴 적 자신을 이끌었던 행위의 의미를 정식화 해보고 싶은 충동이 이따금씩 들었으나 현재까지 이렇다 할 진전은 없다. 지금 이 글도 어쩌면 길 위의 돌을 다시 가서 매만지는 행동일지 모른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근대 시간관념에서 벗어나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켜 있으며 양자 얽힘처럼 시간과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두 요소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시점에 팽팽하게 긴장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마치 미궁 속에서 바깥으로 이어진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기억과 현재가 얽혀있다.
각주
책 속 지도에는 시골집 다락방 서랍에 숨겨 두었던 쪽지처럼 무언가 잃어버린 시절과 접속될 뭉클한 단서가 있을 것만 같았다. 지도는 리씨를 소설을 읽던 십여 년 전 시공간 속으로 소환했다. 현실적인 구체성의 늪에 빠진 리씨에게 어쩌면 판타지 소설의 상상이라는 틈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마치 질식 될 것 같은 현실의 압박에서 어디론가 모르게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고 싶었던 것일까. 리씨가 활동한 자신의 지역을 그린 지도에는 오른쪽 하단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의 삽화로 실린 지도와 18세기 후반 김정호가 그렸다고 추정되는 지도인 ‘수선 전도’를 참조해서 리씨가 활동한 현장이 그려졌다는 각주가 붙어 있다.
예술의 영도
리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이리저리 바람 부는 대로 방랑하다가 모험심에 사로잡혀서 대구잡이 배를 탔다. 한국과 중국의 중간 수역에서 조업하는 그 배는 육지가 안 보이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그물을 놓고 고기를 잡았다. 풍랑이 심할 때면 닻을 해저 70미터에 닻을 내리고 쉰다. 갈매기가 폭풍우 속의 거대한 파도의 잔등에 타서 숨을 고르는 풍경은 계시와 같이 리씨에게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한 달 반의 조업을 마치고 다시 육지로 돌아온 후 그는 미술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3년간의 방랑기에도 리씨의 뇌리에는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이 계산사의 프로그램처럼 가동되고 있었다. 예술 이외에 그에게 지속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거의 사라져 갔다. 귀류법에 의해서 추구할 가치들이 하나하나 목록에서 제외되고 남은 것은 바로 예술이다. 아니 문제가 쓰여 있는 지면 자체가 예술이었을지 모른다. 그 때 그가 참여한 것이 강원도 횡성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열린 ‘하대리여름숲미술제’였다. 그곳에서 예의 목각 작품이 탄생한다. 목각 작업은 인류학적 공동체에 관한 구상과 연결된 행위였다. 리씨의 관념체계는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탐색했다. 그가 보기에 당대 물질의 반영으로서의 미술작품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이 필요했다. 미술재료의 인공성은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고 해악을 끼친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규모로 대량생산되고 대량 폐기되는 상품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사고했다. 숲에서 발견한 나뭇가지들은 어릴 적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시골에서 형에게 낫으로 나무를 깎는 방법을 배워서 칼과 방방이 등 무언가를 조각하던 원초적인 기억이 새로운 예술을 위한 계시를 주는 듯 했다.
선물로서의 조각
미술품이 왜 상품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예술가도 자본주의 속의 상품에 불과한 것일까. 무언가 다른 기초 위에 예술을 살펴보고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아는 지인들을 떠올리면서 선물을 할 생각으로 작품들을 하나하나 구상하고 만들어 갔다. 소박한 행동이었지만, 모든 게 새로웠다. 새로운 것은 아주 조심스레 소박하게 시작되곤 한다. 칼 한 자루와 자연의 부산물인 나무토막 한 개, 그리고 깎고 다듬는 손, 그것을 읽는 눈과 머리 사이를 밝은 태양이 연결해 주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현자인 디오게네스도 부럽지 않았다. 칼 폴라니의 인류학적 경제론과 마르셀 모스의 호혜성의 원리 등이 리씨의 개념에 기름을 부었다.
도상
계산사가 그러하듯 직감적으로 리씨의 머리에 도상들이 떠올랐다. 자본주의 세상을 비추는 태양과 관련한 것이다. 자본의 태양은 그 세상을 구석구석 비춘다. 모든 것을 황금의 가치로 환산하는 빛이다. 실물자산에서부터 금융자본, 예술 자본이 위상을 달리하여 펼쳐진 그래프와 풍경이 섞인 그림이다. 도식과 개념, 그림이 섞인 그 복합적인 무엇.
이카루스 프로젝트
자본주의에 바깥이 있을까. 모든 것이 물고 물려 있는 상황에서 대안적인 몸부림도 결국 체제와 모종의 공모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봐라 이런 대안을 모색하고 있으니 이 시스템은 지속할 만하다. 리씨의 머릿속에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나무를 조각하는 작업을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바꿔보자. 제도 예술에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보자. 어쩌면 감추어진 욕망이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정교하고 인식적 환기를 주는 상품성이 있는 미술 작품의 제작, 그리고 그 처분을 통해서 유입한 자본을 공동체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유용한다. 이것이 ‘이카루스 프로젝트’의 시나리오이다. 자본의 흐름 바깥에 있는 사물, 자연의 부산물과 폐품들을 가공하여 고부가가치로 거래하여 유입한 자본을 다시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토대로 만든다는 아카루스의 도약은 사회적 경제와 자본주의 주류 경제를 연결하는 몸짓이다. 이카루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서 가까이 날다가 날개가 녹아서 추락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리씨에 의해서 재해석된 이카루스는 자본의 태양과 급진적 생태주의의 바다 사이를 지혜롭게 날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과 비전은 다시 쓰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지도를 가지고 두 개의 날개를 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