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의사소통을 할 때 그것이 여러 계층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앞의 글에서 알아봤다. 연인이 전화를 통해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사실 전달되는 것은 전화선을 통한 전압의 변화뿐이지만 이는 연인의 전화 통화에서 가장 흥미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전화 통화에서 전달되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애틋한 감정의 전달일 것이다. 이렇듯 여러 계층을 거쳐 전달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명확하게 그 계층들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어떤 식으로 계층 간에 변환이 이루어지는지 규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경우 맨 아래 물리 계층만 봐도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 그리고 서로 간에 터치라도 이루어진다면 촉각까지 해서 여러 경로를 통하게 된다. 따라서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두 사람이 전화를 통해 얘기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계층도 아주 단순하게 나누어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의도 또는 의미 (애틋한 감정)
말 (‘사랑해’)
음파
전기 신호
이런 다른 수준의 대상을 얘기할 때 계층이 아니라 '층위'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냥 계층이라는 용어를 쓰겠다.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면 그 개념이 명확해지고 논지가 정확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느낌은 착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 글에서는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만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용어의 도입은 최대한 피하면서 이야기를 펴나가도록 노력하겠다. 아무튼 위에서처럼 세 개의 계층으로 단순하게 나눈다면, 한 사람의 의도가 그 사람이 하는 말로 바뀌게 되고 그 말은 전기 신호로 바뀌어 전화선을 통해 상대방의 전화로 전달되고 그 전기 신호는 다시 말로 바뀌어 상대방이 말을 한 사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물리적 매체는 음파와 전기 신호가 전부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단순한 계층으로 나누어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전달 과정을 일일이 따지자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의도 -> 말 -> 음파 -> 전기 신호(송신) -> 전기 신호(수신) -> 음파 -> 말 -> 의도의 이해
하지만 각각의 계층은 다른 계층과 독립적으로, 별도로 언급될 수 있다. 즉 두 사람이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의도가 전달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 전달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이폰에 들어 있는 시리와의 대화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젠가 시리가 나의 표정이나 심리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몰라도 현재는 시리가 마이크로만 사람의 의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전화 통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 사람과 통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해졌다고 하면 당신은 그 의문을 말로 바꾸어 시리에게 전할 것이다. 그러니까, '삶과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한 답은?'이라고 시리에게 질문을 할 것이고 그러면 이는 음파를 통해 아이폰의 마이크로 전달될 것이고 이는 말로 바뀌어 시리의 언어 처리 장치로 전달될 것이다. 이를 이해한 시리는 답을 음성으로 바꾸어 사람에게 전달할 것이고 물론 그 답은 누구나 알다시피 '42'이다.
궁극의 질문은 약간 따분했다. 하지만 만약 시리가 궁극의 질문 뿐 아니라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 모든 학문 분야와 실용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모두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지식에 대한 추구라는 활동은 단순히 시리와의 대화로 귀결될 것이다. 초끈이론이 진짜 맞는지 왜 공간의 차원이 3인지, 심지어 소개팅에 나갈 때 어떤 색으로 코디를 해야 하는지도 질문만 하면 시리가 답을 해줄 것이다.
그러나 시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커녕 내가 아침에 잃어버린 자전거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내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사실 시리는 미리 정해진 질문에 대한 답 외에는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혹은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그런 존재는 없다. 물론 부처나 예수와 같이 영적인 존재로부터 답을 찾는 사람은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답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의미의 계층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의미의 계층에서 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부처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노력이나 예수 혹은 기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 대상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끔 지하철에서 좌석의 커피 얼룩이나 허공의 먼지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주장에 조금 자신이 없어지긴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 나누는 대화는 시리나 다른 현자 또는 성자들과 나누는 대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사람의 인식의 계층, 의미의 계층과는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가 대화의 행위와 다르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심지어 왜 그런 비교를 하는지조차 이해가 안 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세상에 대한 지식의 추구를 대화하는 행위가 어떤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과 유사한 행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마치 세상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 의미의 계층에서 이미 존재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가 그 존재를 찾아다니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듯이. 하지만 세상이라는 것은 의미의 계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화선의 반대편에 세상에 대한 진리를 얘기해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개념화의 문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은 의미의 계층과 다른 계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대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행위는 대화라기보다는 세상을 의미의 계층으로 끌어올리는 행위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에도 세상을 의미의 계층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한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이 글의 시작에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전화를 통해 말을 한다고 할 때)
전기 신호 -> 음파 -> 말 -> 의도의 이해
좀 더 일반적인 계층에 대응해서 생각하면
물리 계층, 혹은 세상 -> 말 -> 의미의 계층
이런 과정을 통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이런 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 계층을 의미의 계층으로 거의 완벽하게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행위와는 다르다. 전화 통화의 경우 의미의 계층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은 전기 신호에 담겨진 내용, 즉, 말하는 사람의 의도이다. 전화 통화가 전기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광섬유를 통해서 전달된다고 해도 의미의 계층에서 전달되는 의도는 바뀔 것이 없다. 전화 통화에서 전기 신호는 철저히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전달하는 매체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렇게 물리 계층에서 의미를 거의 완벽하게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의도를 말로 바꾸고 이 말을 전기 신호로 바꾸는 과정이 선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이미 인위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의도 -> 말 -> 음파 -> 전기 신호
여기서 전기 신호는 철저히 음파를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고 말은 의도를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다. (물론 말, 혹은 언어가 의식을 거의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행히 그런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가는 것 같다.)
이렇듯 세상에 속하는 어떤 대상을 의미의 계층을 운반하는 매체로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의미의 계층으로 끌어올려야만 한다. 물론 대상 자체를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 머리가 암만 커도 토끼 한 마리 이상 넣기는 좀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 대상의 특성들만이라도 모두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측면에서는, 즉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측면에서는 그 대상을 의미의 계층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이 너무 많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토끼'라는 대상을 생각해 보자. 토끼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형태가 있는 사물을 지칭한다고 해서 추상 명사에 대비해서 보통 명사라고 하지만 사실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옆집에서 키우는 토끼'라는 말은 구체적인 사물을 지칭하지만 '토끼'라는 말은 그 많은 토끼 중에서 어느 특정의 토끼를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설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토끼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토끼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은 모둠이라고 생각해 보자.
{토끼, 토끼1, 토끼2, 토끼3, ....}
이들 각각은 각자 다른 특성을 가진다. 이 중에서 맨 앞에 있는 토끼는 뒤의 토끼1, 토끼2, 토끼3, ... 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써 최대한 모든 토끼들의 특성의 공통점을 담고 있다. 귀가 두개고 길다든가 폴짝폴짝 잘 뛴다든가 하는 특성 말이다. 물론 모든 개념이 그렇듯이 명확하게 경계를 그어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모든 토끼가 귀가 긴 것은 아닐 수도 있으므로) 약간의 애매함을 수용한다면 토끼라는 개념의 특성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특성은 몇 가지나 될까? 물론 그 수는 무한대이다. 토끼의 진화 과정이라는 측면만 봐도 관련된 특성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고 토끼의 소화액이라든가 성호르몬, 혹은 발생 과정과 관련된 특성도 한이 없을 것이다. 또한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온 세상 사물과 토끼와의 관계도 토끼의 특성으로 나열해야 할 것이다. 토끼의 특성을 크게 분류해서 그 종류만 따져본다 해도 그 개수는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생리학적인 측면, 사육의 측면, 행동적 측면 등등등.
토끼1은 어떤가? 토끼1은 토끼가 가진 특성을 대부분 가질 것이고 추가적으로 무수히 많은 특징을 가질 것이다. 예를 들어 토끼1의 나이는 몇 살이라든가 2014년 12월 25일 자정 기준으로 북위 37도 5분 동경 128도 17분에 위치한다든가 털은 어떤 패턴을 하고 있다든가 심지어 털의 개수는 몇 개고 한 시간에 몇 개씩 빠지고 있다던가. 이렇게 무수히 많은 특성을 유한한 두뇌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토끼를 의미의 계층으로 완벽하게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앞의 토끼 목록에는 아이가 그린 토끼 그림이나 텔레비전의 자연 다큐에 등장하는 토끼, 어젯밤 꿈에 등장한 토끼 등은 빠져 있다. 이런 토끼들은 실제 토끼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토끼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는 대상들이다. 이런 것들까지 포함된다면 토끼라는 개념의 특성은 더욱 범접하기 힘든 것이 될 것이다.
이런 특성 중 대부분이 무의미한 것이고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특성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특성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 역시 인위적인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토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그런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맥락에서 필요한 극히 제한된 토끼의 특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에 속하는 대상을 다룰 때에는 그 대상의 특성의 일부만 다룰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축약된 특성을 모아 놓은 것을 흔히 그 대상에 대한 개념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개념만이 의미의 계층에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란 것은 이렇게 제한된 특성들만을 모아 놓은 개념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런 개념과 다른 개념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환원론의 문제
이런 얘기는 모든 지식 분야에 다 적용될 수 있겠지만 연구 대상이 명확한 과학에 가장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관점으로 원자론을 본다면 어떨까? 물리적인 면에서 모든 사물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내 앞에 있는 커피 잔에 담긴 커피와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김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의미의 계층에서 봤을 때 커피라는 개념이 원자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커피라는 개념은 커피라는 사물의 극히 제한적인 특성만을 담고 있고 원자라는 개념은 원자라는 사물의 극히 제한적인 특성만을 담고 있다. 물리적으로 커피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선택한 커피의 특성을 원자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극히 제한적인 특성을 조합하여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구성 성분만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 많은 경우 크게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은 선과 점의 관계에서 간단히 볼 수 있는데 '두 점 사이의 선'을 설명할 때 그 선을 이루는 모든 점의 목록은 거의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과도한 환원론도 이런 식으로 물리적인 수준에서의 구성과 개념적인 수준에서의 구성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싶다. 이런 혼란 때문에 발생한 수 있는 오류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자연과학이 철저히 귀납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물리 이론이라는 것이 실험 물리에서 나온 실험결과에서 직접적으로 유추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이론이 실험 결과의 총합에 불과하다는 오해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같다. 물론 어떤 가설이 있을 때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요하고 실험이란 세계의 상태를 수집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거꾸로 진행될 수는 없다. 세계의 상태의 모둠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가설이 논리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이끌어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과학은 어떤 학문인가? 데이비드 도이치의 '무한의 시작'에 따르면 과학은 물질 세상에 대한 최선의 설명을 찾는 학문이다. 즉 과학에서 이론을 수립하는 과정은 세상에 대한 진리를 다루는 과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의 설명을 찾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설명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험 결과와도 부합하면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론을 찾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런 사실은 가장 과학적인 과학인 물리학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한 시대에서 인정받는 물리 이론이 대부분 딱 하나에 불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계층에 대한 혼란은 과학을 비롯한 많은 지식 추구의 과정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계층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이런 오해를 모두 없애줄 수 있으리라고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어쨌든 인간의 지식 추구와 세상에 대한 인식을 얘기할 때 좀 더 초점이 있는 논의가 가능하게 해줄 수는 있지 않을까 한다.
물리 계층, 즉 어떤 실제 대상이 위치하는 계층이 사람의 인식이 위치하는 의미의 계층으로 완벽하게 끌어올려질 수 없는 이유는 그 대상의 특성이 무한히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런 특성을 모두 인식의 계층에 담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을 추구할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많은 질문과 마찬가지로 보르헤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과학의 정확성에 대해서'에서 극도로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제주도의 지도를 만든다고 할 때 가장 정확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가? 제주도의 지형적, 지리적, 지질적 특성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제주도와 똑같은 크기의 섬을 똑같은 환경 하에서 똑같이 만드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지도를 제주도에서 삼성혈을 찾아가는 데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도에서 삼성혈을 찾는 과정이 실제 세상에서 그 장소를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 과정이 될 터이니 말이다. 이런 지도는 지도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제주도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주지 못한다.
인간의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머리에 세상을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동시에 무의미한 일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2, 2015년 2월, 이상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