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15 09:12
[이병주 칼럼] 뒤집어서 읽는 십계명(1)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9,077  


[이병주 칼럼] 뒤집어서 읽는 십계명(1)

이병주(변호사)

1. “믿는 사람에게 세상(땅)이란 무엇인가?”

저는 진지하게 믿는 변호사입니다. 약 20년간 변호사로서 많은 재판을 수행하면서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에 법을 해석·적용하는 일을 생업으로 해 왔으며, 한편으로는 마찬가지로 약 20년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하나님의 법이 세상과 인생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 왔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세상의 법만을 알고 하나님의 법은 몰랐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한동안 하나님의 법만을 중시하고 세상의 법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신앙생활만이 의미가 있고 세상의 일은 단지 먹고사는 생계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일만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속되고 헛된 것이라는 생각’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직장생활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믿음을 풀어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 것이고, 두 번째는 생업(저의 경우에는 법률과 재판업무) 속에서도 만나는 사람들의 현실적 문제와 영혼의 고민들을 도와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만 거룩하고 세상은 거룩하지 않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선교지에 나가지 않아도 교회의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상 속에서 자기가 사는 장소를 선교지로 삼고 하나님의 목자로, ‘세상 속에서’ 신앙적으로 래디컬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도 신앙을 풀어먹고, 직업의 일로도 신앙을 조금씩 풀어먹으니까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스파이’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이렇습니다. 세상과 직장 속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직장 동료들에게 전도도 하고 함께 성경공부도 하고 현실에서 겪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도와주기도 하면서 사건 의뢰인들에게 전도도 하고 영적 교제도 하고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세상과 현실 그 자체는 그대로 놓아두고 거기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여기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세상에 적응은 하지만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구경만 한다.’는 것이 왜 문제냐 하면, 교회와 성경에서 배운 말씀을 잘 적용하면 온유하게 참고 머리를 써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 ‘시험에 들지 않는 것’ 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주기도문의 세 번째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이 배워 온 ‘잘 믿고 사는 것’은 “개인적(個人的)인 차원”에서 ‘예수를 믿고 말씀을 익히고 전도를 하고 양육하고 열심히 살다가 죽어서,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잘 믿고 사는 것의 집단적(集團的)인 차원은 대체로 ‘교회’로 귀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으로 잘 믿고 사는 것의 단순한 산술적 합계처럼 느껴집니다. 그 결과 주기도문 3번 기도의 ‘하나님 뜻’은 믿는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하늘에 연결되고 교회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의 영혼이 집합적으로 구원되고 하늘에 연결되는 것뿐이고, 하나님 뜻이 전개될 장소인 ‘땅’에는 별 관심이 없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람들이 울고불고 하는 ‘정치’ 활동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이 땅에서 사람들이 먹고사는 ‘경제’ 생활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관철되는지, 사람들이 다투는 싸우는 이 땅의 분쟁과 그로 인한 재판에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만큼 들어있고 움직이는지... 등등 현실적인 세상(땅)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신앙은 매우 모호하거나 때로는 무모하게 나타납니다.

저는 본래 하나님을 모르던 땅(세상)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지금도 땅(세상)의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하늘의 일을 알게 된 후에는 상당기간 「땅(세상)의 일은 어쨌든지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땅(세상)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예수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땅(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의미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도 절박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땅(세상)의 일을 규명(糾明)하고 하나님 뜻을 실천(實踐)해 나가는 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규범(規範, Sollen)의 차원에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명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일을 독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事實, Sein)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가 타락시킨 이 세상(땅)과 땅 위의 인생이 과연 어떤 것인지(존재), 어떻게 굴러가는지(운동)를 정확하게 규명(糾明)하고, 땅 위의 인생과 세상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규범적인 접근이 ‘비둘기처럼 순결’한 차원의 일이라면, 사실적인 접근은 ‘뱀같이 지혜로운’ 차원의 일입니다. 그동안 규범적인 측면에서의 노력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등에서 깃발을 담당하고 많은 신학자와 목사님들이 열심히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는 땅의 사람, 세상 속의 진지한 신도들이 그동안의 신앙적 태만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전문성을 이용해서 믿음으로 세상을 해부하고 해석하는 노력에 함께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땅(세상)에서 이루는 일은, 「세상이 주는 시험을 받아 이기고 나아가 거꾸로 세상을 시험에 빠뜨리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험을 잘 받아 내려면, 세상의 냉정하고 거친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에 맞서 대응할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원리도 잘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시험에 빠뜨리려면, 하나님의 원리의 강력을 알고 세상의 약점과 급소도 함께 깨우쳐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의 운동원리와 그 강·약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하나님 원리의 강력한 힘은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서 그 능력이 발현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세상의 법률을 해석(解釋)하고 사실(事實)을 법에 적용하여 분석(分析)하는 일을 직업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법’에 대한 해석과 분석은 저의 전문분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저는 비록 하나님의 법을 직접 전공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오랜 기간 하나님의 법(말씀)을 매우 진지하게 읽고 고민해 온 그리스도인이자 세상법의 전문가로서, 하나님의 법이 땅(세상)의 법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관한 논의를 한번 본격적으로 전개해 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말 것을 지시하는 주관적 행위규범(Sollen)으로서의 성격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을 체계적·유기적으로 배열하고 전개하는 인생의 현실적 틀을 구성하는 객관적 법제도 규범(Sein)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에도 사람의 행위규범이자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과 인생의 현실적 틀(Sein)이라는 법제도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연구들이 하나님의 법을 행위규범의 차원에서 주로 연구해 왔다면, 저는 하나님의 법을 세상과 인생의 현실적 틀이라는 법제도적 차원에서 한번 규명해 보고자 합니다. 원하는 목표는 이 과정에서 「믿음을 통해 세상(땅)을 해석」하고, 「현실(땅)의 일을 통해 믿음을 분석」하는 일을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2. 땅(세상)의 해석(解釋) – 십계명을 뒤집어 읽기

가. 도입 - 율법과 법률의 분열 
‘법률(法律)’은 세상의 용어이고, ‘율법(律法)’은 교회와 신앙의 용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법률은 세속과 현실의 일이고, 율법은 믿음과 영혼의 일이라고 분리시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법률’과 ‘율법’은 다른 말이 아니고 ‘같은 말’입니다. 한자로는 둘 다 ‘법 법(法), 법칙 율(律)’이라는 같은 뜻 한자 두 개를 순서만 바꾸어 쓴 것입니다. 구미(歐美)에서는 법전과 성경이 모두 법(法)이라는 의미로 ‘Law(영어), Gesetz(독어), Loi(불어)’ 한 가지 단어만을 사용합니다. 결국 서구에서는 법(Law)이라는 한 가지 개념 한 가지 단어로 쓰이는 말이, 동양에서는 상이한 번역통로를 통하여 법전에서는 법률, 성경에서는 율법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나뉘어 사용된 것에 불과합니다. 본래 처음에는 비슷한 의미로 쓴 말인데, 어쩌다 보니 이후 ‘사용을 통한 언어의 진화(進化)’ 과정을 통해서 이제 율법(Law)은 신앙적 법으로, 법률(Law)은 세속적 법으로 그 의미와 개념이 분열(分裂)되어 서로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는 말들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법(法)은 물(氵)처럼 흘러간다(去)는 뜻입니다. 본래 원천적(源泉的)으로는 ‘법(Law)’이라는 하나의 강(江)만 존재하는데, 인위적으로 신앙적인 ‘율법(Law)의 강’과 세상적인 ‘법률(Law)의 강’이 갈라졌습니다. 실제로는 하나의 ‘법의 강(the River of Law)’에 하나님의 법(Law of God)과 세상의 법(Law of the World)이라는 두 개의 물결이 함께 섞여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인위적인 착각에 따라서 하나님의 법은 ‘율법의 강’에만 흐르고, 세상의 법은 ‘법률의 강’에만 흐른다는 인식론(認識論)적 오해가 생겼습니다. 

인식론적 오해는 실천적 오류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각각 율법과 법률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다른 강에 나뉘어 흐른다는 인식론적 착각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일과 세상의 일, 신앙의 흐름과 세상의 흐름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여, 어느 한쪽만 취하고 다른 한쪽은 버리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실천적 오류와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그로 인한 위험과 실패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교회와 세상이 나뉘고,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과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이 분리됩니다. 신앙은 인간의 내면만 다루고 인생의 세상적, 외면적 활동은 다루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종교활동은 교회를 둘러싸고만 이루어지고 세상은 완전히 세상의 원리에 맡겨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설교만 듣고 돌아가는 신앙의 구경꾼이 되어 버리고, 세상에서는 세상의 원리에 끌려 다니거나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세상적 원리를 주도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신앙은 ‘착한 일’을 하자고 하지만, 뱀과 이리가 판치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행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니 우리들의 신앙은 하늘(교회당) 속에 갇혀 있고, 땅(세상)에서는 신앙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한 줄기인 ‘법의 강’에는 함께 흘러가는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엉키고 섞여 있습니다(mingled). 이 ‘법의 강’에서 두 개의 물결이 섞여 흐르는 양상의 기본원리는 (i) 하나님의 법의 품 안에서 세상의 법이 흘러가고, (ii) 세상의 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iii)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는 두 개의 물결이 화합하여 평화롭게 흘러가지만, (iv) 인간의 죄성과 욕망이 분출할 때에는 두 개의 물결이 서로 갈등하고 배척하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물결이 하나의 강에서 함께 흘러가니 우리가 땅(세상)의 법을 따라 헤엄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따라 헤엄치는 것입니다(잘 치거나 잘 못 치거나).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신앙적으로 헤엄을 치는 일도 땅(세상)의 법을 따라 헤엄치는 세상의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법(율법) 속에서 세상의 법(법률)을 깨달아야 하고, 세상의 법(법률)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율법)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통일되어 있는 ‘법(法)’이라는 한 단어가, 하나님의 ‘율법(律法)’과 세상의 ‘법률(法律)’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분열된 것은 우리의 교회 속 신앙과 세상 속 인생이 분리된 결과를 상징하기도 하고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해로 분리된 율법과 법률을, 연결이 끊어진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을, 인생 속에서 분열된 믿음의 일과 세상의 일을, 우리가 다시 합치고 ‘쩜매야’ 합니다. 

나.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
여기에서 우리가 논의하는 ‘법(法)’은 법전(法典)이나 법정(法廷)에 갇혀 있는 법률전문가들만의 협소한 실정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法)’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우리들의 인생에 틀(제도)을 제공하고 사람이 일하고 먹고 살고 싸우고 다투는 인생의 모든 살(활동)을 채우는 「인간현실(人間現實)의 총체적 실체」를 의미합니다. ‘법(法)’은 인생이 걸어가야 하는 길(道)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나 세상의 법이나 모두 사람이 한 평생 흘러가는 인생의 강, 걸어가는 인생의 길, 살아가는 인생의 법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운동과 인생의 활동을 구성하는, ‘법’의 대략적인 개요를 정리해 봅니다. 민법의 물권법과 채권법, 그리고 상법의 회사법은 땅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는 인간의 모든 경제생활에 대해서 틀을 제공합니다. 헌법과 형법은 권력의 압제로부터의 정치적 자유와 타인의 폭력으로부터의 신체적 자유를 보장하고 제공합니다. 사회복지법과 노동법은 땅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조(救助)하고 근로자의 쟁의권을 보장하여 사회의 강자와 약자 간의 균형과 평화를 도모합니다. 민법의 친족상속법은 부모자식과 부부간의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보호하며,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은 분쟁과 폭력으로 인간 생활의 틀과 평화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대책으로 재판제도를 제공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하고 먹고사는 일도 법을 통하고, 우리가 싸우고 다투는 일도 법을 통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절규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정치투쟁과 정치운동도 세상을 다스리고 변화시키는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할 힘을 얻기 위한 ‘법적 싸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세상의 법, 사람의 법, 우리가 통칭 사용하는 법률(法律)이 다루는 전체적인 내용들입니다. 사람이 법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로 우리는 법이 없으면 살 수도 없고 법을 떠나서는 살 수도 없으며, 법 속에서 살고 법에 매여 살고 법의 도움을 받다가는 또 법의 억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법은 단지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規範)적 가치의 관념이 아니라, 선악 간에 살아가는 인생의 고민과 모든 치열함이 들어있는 냉정한 사실(事實)과 현실(現實)입니다.

위에 열거된 법들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고 그저 세상의 법이기만 한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민법은 세상의 법임과 동시에 모세에게 하나님이 내려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재판에 관한 소송법도 세상의 법임과 동시에 출애굽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입니다. 세상 삶의 정치·경제·인권의 기본 골격을 규정하는 헌법은 세상의 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하나님 백성의 기본 헌법으로 계시된 십계명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만들고 주고받으면서 먹고사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세상의 법만 따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도 따르거나 또는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생활, 경제생활, 가족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상 율법(律法)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협의(俠義)로 떠올리는 신앙적인 법은 이러한 인생의 법, 세상의 법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찬양과 제사의 법을 추가(追加)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 인간의 내면적 윤리를 법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에 종교법 외에 도덕법(윤리)도 추가, 보충한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에 예배와 찬양의 법을 ‘추가(追加)’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을 배제한 종교의식의 제사법, 종교법에 ‘국한(局限)’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은 (i) 전체집합과 부분집합의 (하나님의 법 ⊇ 세상의 법) 포함관계이거나, (ii) 적어도 교집합 (하나님의 법 – 하나님의 법&세상의 법 – 세상의 법) 이 존재하는 중첩관계이지, (iii) 교집합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 (종교법) ∩ 세상의 법 (세속법) = ∅) 분리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법으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고 적용하는 태도는, 사람들이 땅에서 먹고살고 울고불고 싸우고 다투고 하는 모든 인생의 일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법’을 통째로 들어내서 그냥 쓰레기통에 투기하는 대형 ‘불순종’ 사태를 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종교법에 국한하지 않고 조금 더 보태서 도덕법(윤리) 분야까지 확장한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는 세상의 냉정한 현실과 실제를 모두 섭리하는 하나님의 법을 전체로서 직면하여 다루지는 못하는 ‘한계’와 ‘제한’을 가지게 됩니다.

다. ‘주관적 행위규범(行爲規範)’으로서의 십계명 해석  -  핵심적 금지명령
출애굽기 20장에 규정된 십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법’입니다.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10개조 헌법(憲法)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보통 십계명 중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말라는 제1계명으로부터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제3계명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제4계명」까지의 네 계명을 ‘하나님 사랑’의 계명으로 분류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제5계명), 살인하지 말라(제6계명), 간음하지 말라(제7계명), 도적질하지 말라(제8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제9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제10계명)」까지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의 여섯 계명을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의 원죄(原罪, Original Sin)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죄인 제1계명 내지 제4계명으로 연결됩니다. 아담의 원죄에서 파생되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이웃들을 해치는 파생죄(Actual Sin, 자범죄)는 제5계명 내지 제10계명으로 이어져, 제6계명(살인죄), 제7계명(절도죄), 제8계명(간통죄), 제9계명(위증죄)의 네 개는 범죄행위를 금지하는 형법적 행위규범의 형식으로, 제5계명(부모공경)과 제10계명(탐내지 말라)는 윤리적 행위규범의 형식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제인 세상(땅)에 관한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 중 뒤의 여섯 개입니다. 얼핏 보면 이들은 실천적, 윤리적으로 매우 자명(自明)한 내용들로 그리 어렵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도 당연하고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것도 당연하고 이 정도는 믿거나 안 믿거나 우리 모두 가뿐히 지킬 수 있는 계명으로 보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것도 보통 용감하거나 인생이 아주 복잡한 사람 아니면 감히 저지를 엄두도 못내는 일입니다. ‘위증하지 말라’, 사람이 법원에 증인으로 나갈 기회 자체가 드무니 사실 이 죄는 범하고 싶어도 범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도 자식들이 조금 귀찮아하거나 이기적으로 굴기는 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명제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이웃의 집이나 이웃의 아내나 이웃의 종이나 이웃의 소, 나귀,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마지막 계명은 다른 계명(제7계명-절도, 제8계명-간음)과 중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굳이 행위가 아닌 내심의 의사를 규제한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굳이 ‘남의’ 집, ‘남의’ 물건을 탐낼 이유도 없으니 오케이, 그저 마음을 착하게 먹고 ‘탐을 내지 않으면’ 될 뿐으로 보입니다. 사실 전체적으로 조금 너무 쉬워 보입니다.

십계명을 이처럼 ‘행위규범’으로 해석할 때에, 앞의 네 계명과 뒤의 여섯 계명 사이에,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식에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의 법에는 있지만 세상의 법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뒤의 여섯 계명은 하나님의 법에도 있고 세상의 법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의 하나님 불순종죄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간에 의미와 효과가 뚜렷한 차이로 구별되는 계명입니다. 믿는 사람은 1~4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안 믿는 사람들은 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합니다. 중세 가톨릭 국가 같은 신정(神政)국가에서는 이 계명들을 지키지 않을 경우 종교재판 등을 통하여 처벌까지 하였지만, 현대의 세속(世俗)국가에서는 이 계명들이 헌법이나 실정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상 이 계명들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운명에 심각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제1계명 내지 제4계명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중 ‘신앙문제’의 계명, ‘하늘’에 관한 법으로 나타납니다.

제5계명 내지 제10계명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중 세상의 일, 사람 사이의 일, ‘땅’에 관한 법률입니다. 그런데 앞의 네 계명들과는 달리 이 여섯 개의 계명들은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모두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규범들입니다. 살인, 절도, 간통, 위증은 세속 형법에서도 처벌하는 금지대상이고, 부모공경(효도), 탐심 절제는 타 종교나 세속윤리에서도 동일하게 인정하는 윤리규범입니다. 그러니 5~10계명은 액면(額面)상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차이가 없이 다가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 중 땅(세상)의 법이 신앙의 유무와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는 것 같습니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은, 출애굽기에서 계시된 모세 법이 세상 모든 법률의 출발이자 원형이라고 보는 기독교적 견해를 전제로 해서 「하나님이 주신 법이 비기독교인과 세속 세상까지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서 관철되어 적용된다」는 적극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만히 보면 뭔가 부정적인 면, 소극적인 뉘앙스로 포착되는 점이 있습니다. 십계명 중의 세상 법에 해당하는 5~10계명이 내용상 세속 법률, 안 믿는 사람들의 윤리규범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읽히는 것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세상 속에서 세상의 일을 통해 발현될 때에 세상의 세속 원리와 아무런 차이가 보이지 않는 현상」과 어딘지 매우 흡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즉 ‘이웃사랑의 계명’에서는 왠지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 간에 차이가 없거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문제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십계명을 행위규범으로 평면적으로 읽는다면 (i)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를 통해서는 열심히, 심각하게 하나님을 믿지만, (ii) 제5계명에서 제10계명을 통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에서 나쁜 짓 안 하고 착하게 사는 것 정도’로 족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만일 이렇게 십계명을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이외에는 ‘세상에서 착한 그리스도인’과 ‘세상에서 착한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에는 착한 그리스도인에 못지않게 착한 비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우리보다 더 착한 비기독교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구별과 차이’를 의미한다면, 협의(俠義)의 행위규범으로만 읽는 5~10계명은, 세속의 행위규범에 비하여 많이 구별되지도 않고 차이를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건 뭔가 불만족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사는 것」보다는 더 깊고 더 근본적이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중 세상의 법과 차별적인 1~4계명에만 착념하는 것은 세상의 일에 무관심한 영혼구원 위주의 신앙을 만들어 낼 것 같습니다. 세상의 법과 비슷한 내용으로 5~10계명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일은 착하게, 세상의 원리와 비슷하게 살면 된다」고 세상순응주의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굳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매거나 자기를 부인할 필요도 없어지니 신간(身幹)은 편해지겠지만 뭔가 살짝 예수님을 배신하고 기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른 한편 5~10계명의 이웃사랑에 대해서 너무 윤리적으로만 생각하면 때때로 기독교인들보다도 더 열심이고 헌신적인 세상의 휴머니즘과 개혁주의에 다소 치이는 느낌을 가지는 콤플렉스적 기독교 실천론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5~10계명에 대한 이 양극의 태도는 결국 땅(세상)의 이슈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원리에 기반한 확고한 주관 없이, 실제로는 ‘세상적 관점에 따른 보수적 견해’와 ‘세상적 관점에 기한 진보적 견해’를 각각 그대로 기독교 안에 영입하여 채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라. ‘땅(세상)의 틀’로서의 십계명 해석  – 하나님의 법으로 ‘해석’하는 세상(世上)
자. 이 고민을 가지고 한 발짝 뛰어 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제안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주관적 행위규범’의 측면뿐만 아니라 ‘객관적 세상의 틀, 법제도’의 측면으로 파악하고 해석해 보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제안은 ‘법 해석의 일반원칙’을 적용하여 십계명 규정의 해석을 문리해석뿐만 아니라 십계명의 전체 규정과 그 제정(계시) 배경을 종합한 유기적·체계적 해석으로 보충하자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법으로 십계명을 제정(계시)하신 입법배경과 입법목적을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선악나무의 과실을 따먹고, 마구 선악 판단을 해대는 인간들의 어지러운 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의 헌법인 십계명을 「하나님이 만드신 땅(세상)과 사람들의 혼란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도구, 하나님의 뜻을 땅(세상) 위에서 이루어 나가는 기초」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제정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선악과의 문제, 선악과의 원리’는 우리가 땅(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해석원리로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은 (i) 「인간의 선악판단의 무능력」과 「인간의 죄성」을 전제조건으로, (ii) 「하나님이 만드신 땅(세상)과 그 위의 인생들이 시험에 들고 무너지는 것을 보호하고 세상과 인생을 유지하는 제도」로서의 방어(防禦)적인 기능과 (iii)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세상)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틀」로서의 공격(攻擊)적 기능을 함께 가지는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십계명을 해석하고 세상에 적용하려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악을 올바르게 완전하게 판단하고 있는 선(善)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잘 하려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 선악판단에서 계속 오류와 잘못을 저지르는 선악(善惡)간의 사람’이라는 점을 먼저 인정하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에서 우리가 본 세상에 대한 계명들, 5계명 내지 제10계명을 문언상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세속규범들과는 그 제정의 배경과 제정의 목적이 다르기도 하고 더 깊은 것으로 해석하고 거룩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인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계명의 문언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양날의 칼처럼 날카롭고 복잡합니다. 이 계명이 말하는 ‘이웃의 소유’가 ‘정당한 이웃의 소유’라는 점을 모두가 다 같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타인들은 그 ‘이웃의 소유’를 ‘나로부터 탈취하거나 빼앗아간 부당한 소유’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지키는 자의 입장에서는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고 선한 일이지만,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의 입장에서는 ‘(부당한 탈취물인) 이웃의 소유를 도로 찾아오는 것’이 옳고 선한 것으로 됩니다. 개인적 분쟁이나, 사회적 분쟁이나, 정치적 분쟁이나, 민족 간 분쟁이나, 대부분의 경우 ‘이웃의 소유’에 대하여 대립하는 두 개의 선악판단이 존재합니다. 어떤 재산이 ‘나의 소유’인지 ‘너의 소유’인지에 관하여 대립하는 두 개의 선악판단으로 인하여,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오히려 개인과 개인 간, 집단과 집단 간, 나라와 나라 간의 분쟁과 폭력과 재판(裁判)의 원인(原因)으로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이웃 간의 분쟁의 기본원리와 예방책을 다루는 계명으로, 좁게는 세상 속 민사재판의 원리와 대책을 제시하고, 넓게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회적 분쟁과 다툼을 총괄하는 계명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선악 간에 벌어지는 세상 분쟁의 와중에서 지혜롭게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제10계명의 실천은, 산상수훈 8복 중의 일곱 번째 복(福)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봅니다. 이 계명을 법정에서의 증인(證人)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인생들은 신경도 쓸 필요가 없는 작고 협소한 계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제정배경인 선악과 사건에 비추어 제9계명을 읽으면 여기에서 ‘증인’의 의미와 범위는 훨씬 넓고 높고 깊게 보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악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특히 판사, 검사, 변호사, 언론인 등은 이 선악판단의 일 자체가 일생의 직업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훈련을 잘 받았든 훈련을 적게 받았든, 착하든 착하지 않든, 선악을 제대로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법정’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법정’이 있습니다. 사람의 법정과 여론에서 ‘사람(이웃)의 죄와 벌을 판단하는 심판관(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타인(이웃)의 죄를 증언하는 증인의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무죄한 자를 잘못 정죄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제9계명은 세상 법정의 증인뿐만 아니라 하나님 법정의 증인에 해당하는 세상 법정의 심판자(판사, 검사, 변호사, 사건 당사자)들과 여론재판의 심판자(언론인, 네티즌, 동네사람) 등 세상에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세상의 관원(官員), 모든 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책임을 요구하는 매우 심각하고 근본적인(radical)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땅 위에서 죄 없는 자를 정죄하고 가혹하게 심판하는 거짓 증거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8복 중 5번째의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으로 연결됩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세상의 법정에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긍휼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6개의 계명 중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가족의 근본줄기를 다루고,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은 사람의 삶을 채우는 수평적 부부관계의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죄악이 지속적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해치는 세상에서 부모자식 간의 맹목적이기까지 한 사랑(제5계명)과 남이 만나 하나가 되는 부부간의 영육간의 도움(제7계명)이 없으면 인류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도 자기의 자식에 대해서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도록 사람이 설계된 일, 그리고 전혀 남남인 사람들이 부부로 만나 후손을 만들고 인생의 온갖 답답하고 어려운 일들을 함께 짊어지고 나누면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제5계명과 제7계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폭력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확대되는 정치적 제도의 발전방향을 계시하는 하나님 법의 기본강령이 됩니다. 또한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은 사람들이 땅에서 먹고사는 세상 경제질서의 근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5계명과 제7계명으로는 수직적 수평적 가족관계가 다 커버되고, 제6계명으로 인간의 생명과 자유가, 제8계명으로 인간의 경제생활이, 제9계명으로 세상의 재판이, 제10계명으로 인간의 사회관계가 다 커버됩니다. 여기에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제4계명까지 포함해서 보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노동과 휴식의 조화를 요구하는 사회복지의 기본원리와 제도 또한 십계명 속에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십계명의 각 계명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의 전체 영역을 각각 십분의 일 토막씩 나누어 자기의 영토로 하고 있습니다. 이웃사랑의 여섯 계명은 세상의 영역을 ‘부모(5)/부부(7)/생명(6)/경제(8)/사회(10)/재판(9)’으로 나누어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의 질서를 규율하는 이 계명들은 각각 ‘하나님의 사랑을 지상에서 대행하는 부모(5)’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6)’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돕는 배필(7)’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물질(8)’ ‘하나님이 주신 사회(10)’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지상에서 대행하는 재판(9)’으로 서로 아귀를 맞추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시킨 세상의 모든 영역을 6개의 분야로 다 포괄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원칙을 제시한 6개 분야의 기본적 사회 헌법이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담은 앞 부분의 1~4계명도 세상(땅)에 붙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세상(땅)과 하나님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계시한 인생의 계명, 세상의 계명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말라는 제1계명은 하나님의 절대적 본질을 우리에게 계시하면서(θ의 존재론), 땅(세상)에서 사람들이 인류 자체(인본주의), 사람이 만든 제도(공산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를 신(神)처럼 절대화하여 숭배하는 것을 경계합니다(“땅을 신으로 믿지 말라!”).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다른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을 다른 것으로 덮어 씌어서 왜곡하지 말라는 우리 믿음의 기본원칙을 계시한 것으로(θ의 인식론),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의 영광과 성공과 명예와 탐욕을 끝없이 추구하는 우리들의 땅(세상)에 대한 탐닉과 애착을 경계합니다(“땅의 욕망을 신에게 빌지 말라!”). 그리고 제3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욕보이지 말라는 것으로(실천론), 땅 위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영적 교만과 위선, 어~ 하다 보면 금방 땅(세상)의 욕망에 오염되어 버리기 쉬운 종교활동의 타락과 왜곡을 경계하는 종교활동의 계명입니다(“땅의 더러움으로 신을 오염시키지 말라!”). 그리고 제4계명은 안식을 통해서 땅(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동물과 자연의 휴식과 복지를 요구하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인간과 인간 간의 사랑을 전개하는 제5계명~제10계명으로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땅에서 사람을 쉬게 하라!”).

3. 결 론 – 믿음으로 해석하는 땅(세상), 땅(세상)으로 분석하는 믿음

믿음은 초월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우리의 머리를 하늘을 이고 하늘을 묵상하지만, 믿음으로 움직이는 우리의 발은 땅을 딛고 서서 땅에서 걸어 다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오히려 인생의 자연적인 활동 속에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시기도 합니다. 믿음은 과학을 무시하거나 과학을 배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는 우리의 믿음은 이제 과학적(科學的)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종’과 ‘헌신’과 ‘희생’과 ‘봉사’는 우리 믿음의 중요한 강령(綱領)이지만, 저는 주관적인 헌신과 각오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힘을 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세상(땅) 속에서 살고, 신앙에 인생을 바쳐서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다고 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세상(땅) 속에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땅의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고, 땅은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땅은 거친 힘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먹고 사는 일의 터프함은 신도들로 하여금 ‘평일에는 하나님을 버리게 합니다.’ 주일과 교회에서 순종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헌신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다소 기만적입니다. 땅은 전문적인 하나님의 일꾼들도 압도하거나 속입니다. 세상을 버린 주의 일꾼들로 하여금, 다시  신앙적인 명예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 애쓰게 만드니까요. 사람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약하고 악하기 때문에, 결코 순종과 봉사와 희생의 이름만으로 자기와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누르는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믿음으로 세상(땅)을 과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땅(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10개조의 기본헌법입니다.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관계가 이 십계명의 틀 안에서 움직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선악과 사건의 원리’, 즉 「인간의 선악 판단의 무능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선악판단을 하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을 해석의 기준 내지 준칙으로 하여 하나님이 땅(세상)의 법으로 주신 십계명을 한 계명 한 계명 해부하고 해석해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땅(세상)과 그 위의 인생들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땅(세상)에 이루어지게 하는 방향과 방법을 찾아나가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으로 땅(세상)을 해석한 내용으로, 다시 우리의 믿음을 견주어보면, 우리가 주관적인 순종과 헌신과 봉사와 희생으로 생각해 왔던 우리의 믿음이 과연 어떤 내용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우리의 믿음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발전의 방향을 잡아나가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3월, 이병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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