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06 10:53
누가를 그리워하며: 배제와 포용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609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누가복음』 4장 29절, 개역개정)

1.
‘배제’는 늘 인간적 두려움의 안전한 피신처다. 다르다거나, 틀리다거나, 불안하다거나 모두 어떤 인간적 욕망의 좌절 또는 안정적 삶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수반한다. 따라서 ‘배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이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외부로부터 새로운 바이러스나 세균이 들어오면 반응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배제’가 늘 안전한 것은 아니다. 세포도 가끔 ‘포용’을 생존의 방식으로 선택하듯, 우리도 ‘배제’만큼이나 ‘포용’을 삶의 방식으로 요구받는다. 다른 공동체의 삶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어떤 공동체도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 때로는 문화적 교류와 신체적 접촉이 공동체의 혼란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립이나 배제보다 포용이 훨씬 안전하고 바람직한 반응일 수 있다는 점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공동체 모두의 필요가 아니라 공동체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해 ‘배제’가 ‘포용’보다 먼저 고려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지도자들의 판단기준이 ‘공동체’ 자체의 안위라면 모르겠지만, 공동체를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포용이 스스로의 지위를 손상시킨다는 전제에서 배제를 선택한다면 문제다. 특히 그러한 자기의 판단을 관철시키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눈과 귀를 막는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런 양태는 스스로가 선택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집단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귀족 가문의 자제들 사이의 결혼이 신분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듯이, 피부의 색깔을 가지고 자신들의 편견을 자연의 질서인 것처럼 위장했듯이, 인류의 역사 속에는 ‘신의 선택’에 대한 왜곡과 과장이 가져온 폭력이 ‘배제’를 통해 등장했던 것을 수 없이 많이 보게 된다. 심지어는 내부에서 일어난 일조차도, 의견이 다르면 배제하고 축출하는 일이 다반사이니 말이다. 

2.
누가는 예수님도 당신이 자라나신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다른 성서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어려서부터 지켜보았던 목수의 아들이 자기들을 가르치는 것을 시기한 고향 사람들의 못난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고(마태 13:53-58), 『마가복음』은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동네 사람들의 속삭임에 발끈해서 예수님을 잡으러 왔음을 기록했으며(마가 3:21-36; 6:1-6), 급기야 『요한복음』은 온 유대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요한 7:1). 사실 예수님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다’ 사실은 특이할 것도 없다.

그런데 누가는 배제된 예수님의 모습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바로 이방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흥미로운 것은 처음부터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기 전, 나사렛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또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누가복음』, 4장 22절).

위에서 보듯, 최초부터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시는 ‘은혜로운 말씀’(charis logos)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ptochos), ‘포로가 된 자’(aichmalotos), ‘눈이 먼 자’(typhlos)를 위해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이야기에(누가 4:18), 그들은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귀하게 여겼다.

어쩌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갈릴리 남부 접경지역에 있던 나사렛은 잦은 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셨던 당시에도 로마 군대가 갈릴리 지역을 수비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나사렛 사람들에게 가난과 소외, 전쟁과 상처, 그리고 본토로부터 받는 홀대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두려움의 원천이었을 수 있었겠다. 오죽하면 이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빌립에게 반문하지 않았는가 말이다(요한 1:46).

결국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것을 들었을 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가난으로부터 해방, 전쟁 상처의 치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줄 축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와 “수리아 사람”이 대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누가 4:26-27),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다(누가 4:29). 불신앙에 대한 경고를 되새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배척하면서까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3.
나사렛 사람들이 가졌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누가가 사용하는 ‘thymos’라는 단어는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종종 ‘정의감’과 동의어로 쓰였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감정’으로서 ‘thymos’는 고대 그리스 정치 철학에서는 ‘정치가’가 가져야 할 기질의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느낀 바’를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즉 자기들이 옳고, 예수님은 틀렸으며, 그러기에 예수님을 집단으로부터의 ‘배제’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그릇된 ‘정의감’이 나사렛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 혹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릇된 ‘열정’ 또는 ‘정의감’을 제어할 수 있는 신앙적 자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인간적 욕망과 집단의 정의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 비해 자기들이 더 ‘정의롭다’고 느꼈던 생각의 저변에는 ‘닫힌 마음’과 ‘찬란한 미래에 대한 열망’만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방인’보다 못하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오만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열심만이 최선이던 시대가 혼돈에 빠져들었다. 정해진 목적에 매진하면 매진할수록 형편과 처지가 달라지던 시대도 끝이 났다. 산업화와 민주화와 같은 거대한 이야기가 대다수의 꿈이 되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배제’보다 ‘포용’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다. ‘열정’에 앞서 차분히 돌이켜보는 습관, 시간이 걸려도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태도를 가져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오신다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자기들의 ‘정의감’에 희생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아포리아 편집부, Diagog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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