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2-20 21:35
대 테러 라이브: 이기적 욕망이 빚어낸 좌절의 변주곡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2,381  


'대 테러 라이브': 이기적 욕망이 빚어낸 좌절의 변주곡

1. 

다이하드(Die Hard, 1988)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에 경쟁력을 갖지 못한 시절, 여전히 '대부'와 '벤허'에 빠져있던 우리나라 7080들에게 흥행몰이와 사회비판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던 영화다.

주인공이었던 브루스 윌리스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처럼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마쵸도 아니었고, 그가 열연한 맥클레인이라는 형사는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뉴욕에서 LA로 아내를 만나러 온 그의 모습은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loser'였다. 큰 꿈도 없고, 찬란한 미래도 없다. 단지 소원해진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실패한 가장의 작은 소망이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반면 그가 상대하는 테러리스트 한스 그루버는 전형적인 엘리트다. 뉴욕의 월가에서나 볼 수 있는 산뜻한 정장에, 자본의 그릇된 열망을 가르치겠다는 목적에서 테러를 자행한 고상한 옛날 동독출신의 운동가다. 그러나 '고매한' 운동적 신념으로 위장한 그루버에게서 관객이 결국 발견하는 것은 '자본에 대한 탐욕' 뿐이다. 단지 좀도둑에 불과한 테러리스트가 고상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의 보잘것 없는 영웅의 등장, 이 평범한 영웅이 생존의 위기에서 보여주는 초연한 모습, 그리고 '압도적'이기보다 '끈질기게' 살아남는 잡초같은 인생은 '황야의 무법자'와 같은 서부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스토리다. 다만 '영원한 것'과 '거대한 것'을 쫓는 사람들보다 더욱 세상적 가치에 태연한 주인공으로부터, 출세에 눈먼 기자와 위계에 맥빠진 경찰이라는, 서부영화에서 잘 볼수 없었던 '정의를 앞세운' 부조리의 한심한 앙상블을 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정치 권력의 무능력은 덤으로 주어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Nothing lasts forever)라는 1979년 로드릭 도프(Roderick Thorp)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딸을 아내로 바꿔 애정 코드를 강조하고, 마쵸의 영웅적 액션이 감독의 손에 의해 보잘것 없는 잡초의 승리로 채색되었다. 원작보다 영화에서 사회비판적 기지가 더욱 발휘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섭외 단계에서 아놀드 스왈제네거가 출연을 거부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출연했다면 근육 코드가 사회비판적 마디마디를 모두 잠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대 테러 라이브'(2013)를 '다이하드'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영화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다이하드가 떠올랐다면 조금 지나친 해석일까. 쌩뚱맞은 비교라도 상관없다면, 둘은 비대칭적으로 닮아있다. 테러리스트와 상대가 표현하는 엘리트와 잡초라는 사회적 표상도 서로 상반되게 세웠고, 이야기가 지향하는 공감의 코드도 사회적 맥락만큼이나 규범적 내용이 다르다.   

주인공은 잘나가다가 상관으로부터 물먹은 뉴스 진행자다. 누가 보기에도 그는 출세의 가도에서 잠시 멈추어선 엘리트다. 잘생겼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고, 누구보다 바닥의 생리를 잘 아는 현실주의자다. 'loser'는 아니다. 촉수가 예민해서 여간해서는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다만 적당하게 부패하고, 헤어진 아내와의 결합을 원하는, 이른바 로맨티스트적 구석이 '다이하드'의 맥클레인과 닿아있다.   

반대로 테러리스트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받으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진 소시민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이유에서 테러를 감행했는지는 테러리스트의 일방적 언어로만 전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몇 마디 대사가 관객이 테러라는 불법적이고 위험한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토대를 상당부분 잠식한다. 보상없는 일용직 노동자의 설움, 공권력이 지키고자하는 사회적 권위, 시청률과 출세에 허덕이는 고위직 언론인의 기만, 이 모든 '합리적' 선택을 가장한 욕망의 변주곡들이 관객을 선과 악의 복잡한 실타래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닌다.'는 경찰청장의 이야기로 볼 때, 주인공의 행태를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가진 점에서 볼 때, 매우 유능하지만 '개천에서 용나지 않고서는'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이다. 어쩌면 이런 현실을 비관적이고 숙명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거대한 슬로건이나 고매한 신념을 제시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지 '인간답게 대접받지 못한 아버지에게 사과하라.'는 말만 반복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주요 인물들 거의 모두가 실패자다. 주인공은 성공도 사랑도 다시 찾지 못했고, 그 바닥에 그 정도 위치면 누구나 저질렀을법한 부적절한 행동까지 폭로되었으며, 마지막에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조차 가로막혀 죽음을 선택한다. 국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비서실의 인사는 무개념으로, 경찰청장은 오만함으로, 대테러반장은 오판으로 모두 'loser'가 된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도 끝내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체 죽음을 맞이한다. 유독 '흔들리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시청률 78%를 찍고 본부장을 차지하게 된 보도국장과 그 혼란 속에서 시청률을 챙긴 언론사 사장밖에 없다. 게다가 이 사람들의 충고를 들었다면, 주인공은 자기의 목숨, 출세, 그리고 얄팍한 정의감도 지킬 수 있었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보도국장과 사장도 결국 실패자다. 사회 지도층으로서 자기들이 대중에게 내세우는 바와 스스로가 선택한 바가 가져오는 차이, 여기에 더해 자신들의 터전인 언론사 건물이 폭발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패의 변주곡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기자로서 옛날의 순수한 동기를 회복했을지조차 미궁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참된 기자의 모습, 따뜻한 인간애와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그녀의 죽음은 또 다른 좌절, 희망없는 로맨티스트의 파국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가 테러리스트의 손에서 자기 손으로 옮겨온 폭발물 스위치를 누를 때, 이러한 행동이 진정 이기적 욕망에 매몰된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상상에 맡겨진 것이다.     

'블랙호크다운"(Black Hawk Down, 2001)에서 선보인 기법에 CG가 가미된 것이 인상적이다. CNN의 전쟁 보도를 보는 듯, 스크린으로 보는 생생한 사건을 통해 관객이 뉴스처럼 사건을 인지하도록 만드는 기법이 박진감을 더한다. 여기에 잘 다듬은 컴퓨터 그래픽, 테러리스트와 스튜디오의 주인공이 갖는 인터뷰, 그리고 스튜디오를 둘러싸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사건'으로부터 벗어나 관객을 판단자로 유도한 것은 한층 발달된 기법으로 보인다. 상황을 전달하는 스크린 기법에 그치지 않고, 대화와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마치 연극을 보는듯한 재미까지 더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잘나가는 몇 사람의 탐욕이 빚은 문제를 모두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부조리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3.

'다이하드'의 소박한 영웅이 보여주는 '기회'와 '잡초'의 코드보다 '대 테러 라이브'에서 소심한 테러리스트가 보여주는 '실망'과 '좌절'의 코드가 더 착찹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사실 '실망'과 '좌절'은 모든 것을 '갑과 을'의 관계로 보기 시작하는 나이조차도 훨씬 지나버린 7080에게는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만드는 화두다. '인간대접 받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촉수'와 '딜'로 일그러진 사회에서 좌초될 때, 그것이 '다수'의 안전을 빌미로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는 정치와 충돌되었을 때, 무모하고 불법적인 요구 방식을 가진 '불쌍한' 테레리스트를 자기도 모르게 동정하는 스스로에게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단지 사과를 받으려고 했을 뿐이다.'는 다이하드의 그루버와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소박한 테러리스트의 죽음이 추동하는 반성을 곱씹어본다. OECD 빈곤지수 6위의 나라, 자살률 1위의 나라에서, 여론 지도층에서 일어나는 촉수와 딜만으로 규정되어지는 행위의 규범이 어떤 위험성을 가지는지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대 테러 라이브'는 이런 이기적인 행위 규범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와 정치가 어떤 형태의 또 다른 '불필요한' 좌절을 가져올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어설픈 행동경제학이 말하는 규칙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일 때, 이기적 욕망에 기초한 '합리적 선택'의 신화만이 강요될 때, 그리고 이런 행위 규범들을 견제할 수 있는 가치와 원칙으로 마련된 선택지가 부재할 때, 단지 사과만 받겠다는 생각으로 너무나도 잘못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없을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1, 2014년 1월,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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