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한 자락. 그것은 ‘ㄷ’자형 한옥과 함께 했다. ‘ㄷ’자형 한가운데에는 아담한 마당이 있고, 그 위 길게 늘어진 처마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집이었다. 여름이면 앞뒤로 맞바람이 쳐서 유독 시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루에 누워 처마 사이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살포시 잠이 들곤 하였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방금 전 보았던 구름의 형상들이 하나둘 펼쳐지는 것이다. 유유히 떠다니던 뭉게구름은 거대한 산의 바위나 넓은 바다의 파도와 같은 모양을 띠다가 이내 흩어져, 꽃밭 위를 나는 나비가 되기도 하고, 머리를 맞대고 싸움을 벌이는 두 마리의 용이 되기도 하고, 어느새 푸른 초원을 힘차게 뛰어가는 야생마 무리로 변모하곤 하였다. 내 유년의 집은, 살랑살랑 귓불을 만져주던 바람은, 처마 사이로 펼쳐지는 하늘은, 그리고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은, 한데 어우러져 참으로 신비로운 세계를 펼쳐보이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련한 꿈의 세계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세계, 즉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무쌍함이 펼쳐지던 세계였던 것이다.
2.
수만큼이나 객관적이고 명증한 것은 없다. 그런데 내 유년 시절 마주한 자연세계는, 수야말로 객관적이고 명증한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깨뜨린다. 가령 살랑살랑 귓불을 만져주던 바람은 어떻게 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처마와 같은 유한의 틀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하늘은 또 어떠한가? 바람과 하늘처럼 특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몇몇 특정한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구름의 경우 얼핏 보기에 하나, 둘 그 수를 셀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우리가 세었던 수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마리의 나비, 두 마리의 용, 여러 무리의 야생마들로 변모하고, 다시 이들이 하나로 뭉쳐 커다란 구름이 되었을 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셀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연물을, 대상을, 진정 정확하게 셀 수는 있는 것일까?
수를 셀 수 있다는 것은 그 각각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고, 수를 세서 구분할 수 있는 각각의 것은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령 들판에나무 2그루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에 대해 둘이라고 수를 셀 수 있는 것은 각각의 나무들은 서로 구분되며, 각각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를 구획하고 정의내릴 때 수적 구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체를 수로 구분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뻔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사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반성적으로 사유되던 문제였다.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수를 셀 때의 대상이 되는 ‘실체’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맥락에서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며, 그래서 불변하는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에서는 오로지 ‘신(神)’ 이외에는 실체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신이야말로 스스로에 대해 그 존재성을 부여할 수 있고 영원성을 지닌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실체가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즉 자연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짜의 것에 불과해지고 만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실체는 그 자체 스스로 존재하며,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공간적인 특성을 지닌 ‘연장’과 정신적인 특성을 지닌 ‘사유’-에 의해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연장은 사유 없이도, 사유는 연장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속성은 실체를 스스로 존재하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이들 속성에 의해 이루어진 실체 각각은 서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실체 개념은 신적 세계에서 인간을 포함한 자연세계로까지 확장시켜 적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것, 예를 들면 2그루의 나무들은 연장의 속성에 의해 각기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그 각각은 서로 구분된다. 이렇게 구분된 실체에 대해 수를 세는 행위는 곧 이들이 서로 다른 실체임을 판별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동일한 속성을 지닌 실체가 여럿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스피노자에 의해 부정된다. 스피노자의 경우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자기 자신 이외의 그 어떤 외적 원인도 필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수를 세는 행위는 한정된 범위(외적 원인)를 요구하기 마련이어서 수적 구분의 방식은 실체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데카르트가 범한 오류는 외적 원인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수적 구분의 방식을 자기 자신 이외의 그 어떤 외적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에 무리하게 적용하려 한 데에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수적 구분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양태란 실체의 변용을 의미한다. 나무를 둘이라 셀 수 있는 것은 그들 각각이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변용의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하나는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키가 작고 잎이 앙상한 나무이거나, 혹은 하나는 나그네에게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나그네의 허기를 달래주는 열매를 제공해주는 나무라는 식의 양태의 측면에서 각각을 구분할 수 있고, 이렇게 구분될 때 비로소 그 수를 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나무라는 하나의 실체는 여러 개의 변용된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실체는 수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실체의 속성은, 그것이 연장이든 사유이든 상관없이, 실체를 수적으로 구분해주는 요소가 아니라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속성들을 통해 변용된 양태에 의해 수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즉 실체는 하나이며 그것이 속성들을 통해 무한하게 변용된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실체가 무한한 양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외적 원인 없이 실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규명할 수 있는 생산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다시 내 유년의 기억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내 유년의 집은, 살랑살랑 귓불을 만져주던 바람은, 처마 사이로 펼쳐지는 하늘은, 그리고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은, 자연세계 내에서 한데 어우러져 각기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각기 수적으로 구분될 수 없으며, 설사 구분되더라도 그것은 자연세계의 변용된 양태일 뿐이고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 다시 말해 단 하나의 실체로서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3.
앞서 내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 것,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실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 것은 시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실체를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한 사유에서 특히 표현의 문제에 주목한다. 이는 다음의 두 문장을 통해 압축적으로 설명된다. “실체는 그의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며, 각 속성은 하나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리고 “속성들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며, 각 양태는 하나의 변양(變樣)modification을 표현한다.”(G.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권순모 역, 인간사랑, 2003, 20쪽.) 다시 말해 실체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된 양태들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이때의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 사이를 연결해주는 주요 매개가 된다. 표현의 차원을 중심으로 들뢰즈가 스피노자에게서 주목한 실체, 속성, 양태 간의 관계는, 시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이미지의 표현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미지는 특유의 비유 체계를 통해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은유를 꼽을 수 있다. 은유는 ‘A는 B이다’의 형식으로 구현되며, 여기서 주어에 해당하는 A는 표현하고자 하는 실체에, 빈사(賓辭)에 해당하는 B는 실체의 변용된 양태이거나 양태의 변양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 A와 B는 속성을 매개로 서로 관계하게 된다. 다음의 시를 통해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내 마음은 湖水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王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最後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에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세이오리다.
내 마음은 落葉이오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리다.
― 김동명, 「내 마음은」
위 시는 은유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은유로 구조화된 시구, ‘내 마음은 호수요’에서 실체(‘내 마음’)는 양태 내지는 양태의 변양(‘호수’)과 동일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관계 성립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이 둘이 서로 속성에 의해 깊은 연관성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호수’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속성들, 이를 테면 ‘깨끗하다, 맑다, 넓다, 아름답다 ……’ 등등에 의해 ‘내 마음’에 내포된 순수함의 본질이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시에서 은유는 각기 연을 달리하며 ‘내 마음은 촛불이오’, ‘내 마음은 나그네요’, ‘내 마음은 落葉이오’ 등으로 확장·변주된다. 이는 실체(‘내 마음’)의 양태 변양은 무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등)을 뜻한다. 결국 표현의 측면에 주목할 때, 이미지는 실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속성에 의해 구현되며 이렇게 해서 구현된 이미지는 실체의 다양한 양태들과 이들의 변양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로지 하나의 형상만을 띠지 않으며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여 드러난다. 바로 여기에 시 이미지가 펼쳐내는 다채로움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실체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된 양태들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이때의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 사이를 연결해주는 주요 매개가 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두자. 그리고 실체는 무한한 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들 속성들 간의 관계 양상에 따라 무한한 수의 양태들로 변모하며 이들은 다시 수많은 변양들을 낳는다. 그렇다면 표현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실체, 즉 실체에 관한 표현 형식으로서의 이미지 또한 다양한 속성들 간의 관계 양상에 따라 수많은 양태와 다양한 변양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지의 차원에서 실체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다(多)로 확산되며, 이 과정에서 실체의 양태들, 양태의 변양들 간의 질적 차이가 생성된다. 앞선 시에서 실체로서의 ‘내 마음’은 변양으로서의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등과 각각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각각은 서로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즉 ‘내 마음’=‘호수’, ‘내 마음’=‘촛불’, ‘내 마음’=‘나그네’, ‘내 마음’=‘낙엽’ 등과 같은 등식은 성립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라는 공통항을 중심으로 ‘호수’≠‘촛불’≠‘나그네’≠‘낙엽’ 간의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등의 양태 내지는 변양들은 실체에 해당하는 ‘내 마음’의 본질을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 존재 근거가 부여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각각은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각기 구분될 수도 없다. 다양한 속성들을 통해 표현되는 과정에서 이들 양태 내지는 변양들은 오로지 실체에 내재되어 있는 질적 차이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에 이들에 대해 수를 세는 것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표현의 차원에서 이미지는 실체를 특정한 것으로 수렴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는 실체가 지닌 다양한 속성들, 다양한 양태들과 변양들을 통해 질적 차이를 구현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미지의 차원에서 ‘1=1’이 아니라 ‘1=다(多)’인 것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발에 꼭 끼는 장화 때문에 늘 울고 다녔다. 발에 맞는 장화를 신었다 해도 울고 다녔을 테지. 어릴 때부터 울보였고 발은 은밀히 자라니까. 두번째 분홍 설탕 코끼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코끼리가 두 마리 있는 건 아니었다. 설탕이 두 봉지 있는 것도 분홍이 두 바닥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도 없었지만 분홍 설탕 코끼리는 오늘도 언덕에 누워 설탕을 먹고 분홍에 대해 생각했다. 코끼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나. 아주 오래전 일이라 잊었나. 설탕, 하고 발음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바보, 모든 설탕은 녹는다. 뚱뚱해지는 건 시간문제. 계절이 지나자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설탕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풍선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풍선 풍선 풍선이 되었다. 할 짓이 없구나. 네, 그럼요 그럼요.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받는 느낌도 없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그러듯 막 대해줘도 좋을 텐데. 풍선 풍선 풍선은 일부러 잃어버린 장화 한쪽을 손에 들고 이미 녹아버린 설탕을 음미하면서 하늘에 떠가는 분홍 설탕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구름 같았고 추억 같았고 눈물 같았다. 불지 않는 바람의 깃털 사이로 풍선 풍선 풍선의 없는 꼬리가 한 번 나부꼈다. 아니, 두 번 나부꼈다. 아니, 세 번 나부꼈다.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 멋진 이름이다. 어제부터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 이제니, 「분홍 설탕 코끼리」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위 시를 살펴본다면, ‘분홍 설탕 코끼리’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변용된 양태이거나 변양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분홍 설탕 코끼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코끼리가 두 마리 있는 건 아니었다.”에서처럼 그것은 수적으로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것은 색(‘분홍’), 성질(‘설탕’―달콤함과 같은), 외양(‘코끼리’) 등과 같은 다양한 속성을 매개로 펼쳐진 실체의 특정 양태이거나 변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홍 설탕 코끼리’가 과연 특정 의미로 수렴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미 논의한 바 있듯이 시 이미지는 실체를 특정한 존재로 수렴시켜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속성들의 관계 양상에 따라 표현된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지는 더 이상 ‘~ 이기’를 멈추고, ‘~ 되기’로 나아간다. 들뢰즈에 따르면, ‘~ 이기’가 동일성의 차원에서 실체를 규정하는 것을 뜻한다면, ‘~ 되기’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모하는 것을 뜻한다. 즉 이미지는 존재의 차원에서 벗어나 생성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실체가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고, 실체 내 속성들은 변용된 양태와 변양들로 표현되는 한, 그리고 이들 각각이 구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명증하게 수로 셈할 수 없는 한, 실체에 대한 표현 형식으로서의 이미지 또한 생성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 시에서 ‘분홍 설탕 코끼리’가 ‘분홍 설탕 풍선’이 되고, 다시 ‘분홍 설탕 풍선’은 ‘분홍 풍선 풍선’이 되고, 또한 ‘분홍 풍선 풍선’은 ‘풍선 풍선 풍선’이 되고, 급기야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이 되는 무한생성의 양상은 실체가 무한한 속성들로, 그리고 속성들이 무한한 양태와 변양들로 표현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홍 설탕 코끼리’가 실체가 아니라 그것의 양태 내지 변양이듯이, 각각의 ‘분홍 설탕 풍선’, ‘분홍 풍선 풍선’, ‘풍선 풍선 풍선’,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도 특정한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생성의 원리를 담지하고 있는 실체의 무한한 변용인 것이다.
실체의 무한한 변용과 생성을 표현함으로써 이미지로 충만한 시, 실체의 존재를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시, 그래서 더 이상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따지지 않는 시를 우리는 어떻게, 왜 읽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답을 해보자. 간혹 아이들은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수를 세곤 한다. 가령 ‘하나 둘 셋 일곱 여덟 여섯 일곱 아홉 열’ 하는 식으로. 이때 그 셈의 대상이, 그 실체가, 우리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딱지이건 구슬이건 그것은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다. 혹 그것은 반드시 열 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주머니 한가득 만져지면 그만인 것이다. 일종의 충만감. 그것으로 즐겁고 행복하면 된 것이다. 시도, 그리고 이미지도 그런 것이다. 실체의 무한한 변용과 생성, 그리고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유희와 이를 느끼는 감화의 차원.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분홍 설탕 코끼리」의 시적 화자는 실체의 무한한 변화와 생성에 덧붙여 뜬금없이 “멋진 이름이다. 어제부터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로 끝맺고 있다. 그렇다. 한바탕 벌인 변화와 생성으로서의 이미지 유희와 그것에서 비롯된 감화.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copyrights@aporia.co.kr ([함종호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8, 2016년 8월, 함종호, 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