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과 ‘종교’라니!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우선 ‘욕’은 아래 세상 시정잡배들의 세계에서 험하게 주고받는 것이고, ‘종교’는 거룩하고 깨끗한 하늘의 세계를 다루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함께 거론하는 것은 너무 불경(不敬)스러운 것은 아닌가? 또한 애들 노는데 눈치 없는 어른이 끼어드는 것처럼, 인간들이 욕하는 얘기로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불청객처럼 ‘신(神)’이 끼어들면 분위기만 엄숙하게 만들고, 이제 막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이른바 「‘욕’학(學)」의 생기(生氣)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가...? 그럴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치열하게 ‘욕’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인간(人間)의 세계’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이미 ‘신(神)적 세계’가 구체적이고 때로는 결정적인 모습으로 이미 들어와 현존(現存)하고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신(神)은 실재(non-fiction)일 수도 있고 허구(fiction)일 수도 있지만, ‘욕(辱)의 세계’에서는 ‘신적 세계’의 현존과 그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20세기의 몸통 대부분에 해당하는 1917년~1990년의 70여년 기간 동안 세계의 가장 큰 ‘욕’ 전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간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진 후 ‘혁명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대혈투 양상은 일단락되고, 2001년 9.11.사태를 전후로 해서 21세기 세계의 중심적인 ‘욕’ 전쟁은 기독교세계와 이슬람교 진영 간에, 즉 ‘신’과 ‘신’ 간에, 똑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이삭의 신’을 믿는 신앙과 ‘이스마엘의 신’을 믿는 신앙 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하늘과 하늘의 싸움으로, ‘이 하늘’과 ‘저 하늘’의 싸움이 그 것을 대신하는 땅 위 사람들의 싸움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 세상의 모든 ‘욕’들, 즉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분쟁, 문명과 문화의 전개와 충돌의 현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종교의 세계, 신적 세계관에 대한 진지한 고려와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신론과 무신론(유물론)의 싸움을 생각해 보자. ‘무신론(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유신론이 보여주는 ‘신의 우월성’과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원죄 관념’은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에 대한 극심한 모욕(侮辱), ‘신의 인간에 대한 욕(辱)’이다. 반면 ‘유신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神)이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과 세계에서 신의 관념과 영향력을 일체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무신론(유물론)은, 신에 대한 모욕(侮辱), 즉 ‘인간의 신에 대한 욕(辱)’이다. ‘인간은 신을 욕하고, 신은 인간을 욕하는’ 이 싸움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민족과 나라에서, 수많은 가정에서, 그리고 한 개별자 사람의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벌어져 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나는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원래는 사월 초파일에 태어나서 지금도 매년 생일을 석가 덕분에 공휴일로 얻어먹고 있고, 내 인생의 압도적인 기간인 37년 동안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물론 사회과학적 유물론까지 섭렵해가며 매우 독실한 무신론자(유물론자)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유물론자들이 가지는 ‘인간의 신에 대한 욕(辱)’이 가지는 거의 모든 레파토리에 대략 정통하고, 지금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의 인간에 대한 욕(辱)’의 이유와 근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상호 욕’은 단지 문화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생(人生)에 대한 욕’, ‘인간의 운명(運命)에 대한 욕’, ‘인간의 실존에 대한 심각하고도 고통스러운 고민과 씨름’들의 심연(深淵)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과 신 사이의 상호 욕은, 무신론(유물론)과 유신론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신을 얼마든지 모욕(侮辱)하며 살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이런 믿는 사람들의 실질적인 배신(背信)으로 고통하며 그들을 욕하게 된다.
이처럼 ‘종교’는 ‘욕’과는 무관하게 깨끗한 비무장지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종교’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욕’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신을 고약하다 욕하고 신은 인간을 죄인이라 욕한다.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을 교만하다 욕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사람을 무식하다 욕한다. 이 신은 저 신을 욕하고, 이 신을 믿는 사람은 저 신을 믿는 사람과 욕하며, 자기 신을 위하여 아니면 자기 ‘신(神)념’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움을 한다. 이처럼 이 세상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욕’을 넘어서,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이, 인간과 신이, 인간의 운명(運命)과 신의 의지(意志)가,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이, 서로 뒤엉켜 욕하고 겨루며 씨름하는 거대한 ‘욕의 향연(饗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욕’을 다루는 이 책에서 ‘진정한 욕의 보고(寶庫)’인 ‘종교’를 거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랴. 그러나 ‘종교’의 세계는 ‘욕 폭탄’으로 가득한 지뢰밭과 같다. 여기를 밟으면 믿는 사람이 욕하고, 저쪽을 밟으면 안 믿는 사람이 욕하고, 이 욕 저 욕 온갖 욕을 다 먹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다소 조심스럽고 어렵더라도, 이제 ‘욕의 종교학 시론’을 한번 시작해 보자.
2. 인간의 ‘운명(運命)’에 대한 욕, 인간의 ‘실존(實存)’에 대한 욕
2.1. 기독교의 창세기는 ‘태초에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라고 하여 ‘신(神)’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사는 ‘인간(人間)’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2. ‘인간의 운명(運命)을 욕하지 않는 사람들’ : 가끔 ‘인간의 운명을 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이 만족스럽고 세상이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본다. 진짜 그 속이 어떤지는 다 알 수가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사는게 자랑스럽고 자신감 있어 보이고 평안해 보이고 만족스러워 보인다. 비꼬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지 않은 사람이 그런 척 하는 것’과 ‘진짜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은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성실하고 착하고 근면하고 양심적이고 명예를 중시한다. 그리고 최대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고 실제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욕하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욕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생을 욕하지 말고 긍정하고 이기며 살 것을 권고한다. ‘인간의 운명을 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도대체 신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을, 자신의 이성과 오성과 감성과 의지력을 필요로 할 뿐, 그다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에 대해서 별로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착한’ 이 사람들은 ‘신을 욕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 ‘신’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크게 ‘모욕’을 받는다.
기독교의 안팎으로 유명한 ‘이순신 장군 Problem’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훌륭한 이순신 장군도 예수를 안 믿었으니 지옥에 간다는 말이냐?」라는 난문(難問)이다. 기독교 신자에게 이 문제는 상당한 trap(함정)이다.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도 지옥에 간다.’고 대답하기에는 마음이 조금 찔리고,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은 지옥에 안 간다.’고 대답하면 기독교의 교리가 흔들리고 예수를 믿어도 안 믿어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에 화를 내고, 어떤 사람들은 궁리 끝에 ‘남의 영혼 신경 쓰지 말고, 네 영혼에나 관심을 가지세요.’라고 하면서 화살을 피한다.
이순신 장군보다 먼저 살았던 이탈리아의 단테도 ‘이순신 장군 문제’를 풀려고 무척 고심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위인인 철학자 플라톤을 놓고 이순신 장군 Problem에 걸렸다. 예수 이전의 인물로 예수를 믿지 않았던 철학자 플라톤은, 중세 교부철학의 이론적 정립에 크게 기여한 바 있으므로 기독교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는 존중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단테는, ‘플라톤처럼 위대하고 진리에 가까운 이론을 남긴 철학자를 다른 악인들처럼 지옥 불에 고통 받게 하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질문과, ‘그가 예수를 안 믿었어도 천국에 있을 수 있는가?’ 라는 두 개의 모순된 질문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Divine Comedy) 제1편 지옥편(Inferno)에서 「지옥의 9개 원(圓) 중 입구의 첫 번째 원에 림보(Limbo)라는 지역을 만들고 거기에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존경하는 문학가 호메로스 등 ‘예수 안 믿은 위인(偉人)’들을 위치 짓고, 그들이 비록 천국의 극락(極樂)과 행복을 맛보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지옥불의 고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이생처럼 오고가고 거닐면서 철학을 논하는 것」으로 그려놓았다. ‘지옥’은 ‘지옥’이되 아주 ‘고통스럽지는 않으니’ 단테로서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내서 ‘절묘한 답’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테가 그려놓은 지옥의 ‘림보’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별로 고통스러워보이지도 않고 그냥 살만한 것 같아 보여서, 이건 뭐 지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단테는 이 대목에서 ‘문제를 풀지 못하고서, 마치 문제를 다 푼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는 엉터리 학생’처럼 보인다.
각설(却說)하고, 이렇게 가끔 ‘자기의 운명을 욕하지 않는 사람들’, 아주 착하고 훌륭하고 법(法) 없이도 살 수 있고, 신(神)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생은 시간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강력하게 요동하고 변하니, 그들의 전후(前後) 좌우(左右) 사정과 마음 속 깊은 곳의 상태가 어떤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도 ‘인간의 운명’을 욕하고 저주하고 싶은 ‘실존적(實存的) 순간’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조금 비현실적이다. 그 훌륭한 이순신 장군도, 원균의 모함과 어리석은 왕의 결정으로 삭탈관직당하여 백의종군을 할 때, 본가를 지키던 자기의 아들이 왜구에 의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을 때,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일대승전을 거두었으나 본인은 총탄을 맞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고, ‘인간의 실존(實存)’을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숨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적어도 명시적으로 ‘자기의 운명(運命)’을 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사람이 ‘인간의 실존(實存)적 조건을 욕하는 것’과 ‘인간의 운명(運命)’을 욕하는 것 사이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석을 해 본다면, ‘사실적(事實的) 차원’에서 「‘인간의 실존(實存)적 조건’을 욕하는 사람」 들은, ‘규범적(規範的), 가치적(價値的) 차원’에서 「인간의 운명(運命)을 욕하는 사람」과 「인간의 운명을 욕하지는 않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을 욕하는 것이 ‘인생의 조건(條件)’을 욕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운명을 욕하는 것은 ‘인생 그 자체(自體)’를 욕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의 인생(人生)에 대한 욕’의 강도와 질(質)이 달라지고, 사람의 종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은 욕하지만, 인간의 운명은 욕하지 않는 사람’은 장렬(壯烈)한 무신론자로 남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욕하면서, 인생의 운명 자체를 욕하게 되는 사람’은 인생의 자립성과 자결성에 대한 고집을 꺾고 ‘신적 세계’의 문턱 앞에 서게 된다.
2.3. ‘인간의 운명을 욕하는 사람들’ :모든 사람은 평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편하지 않고 힘들 때가 많으며, 감당하기 어렵고 벅차다. ‘운명’에 부딪쳐 이기거나 버티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운명에 부딪쳐 쓰러지거나 넘어진다. 시시껄렁한 인생의 소일거리와 일상이 없다면, 사는 일은 견디기 어렵다. 좋은 일만 기억하고 나쁜 일은 잊어먹는 교묘한 ‘선택적 기억력’의 기제가 없다면, 우리는 자기의 인생을 돌이켜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경쟁(競爭)’이란 두 글자는, 카인과 아벨의 경쟁 이후 모든 인생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 ‘경쟁(競爭)’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번호를 먹이고 사람들의 교환가치를 규정하는 마법(魔法)으로,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모든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든다. 사람은 살다가는 결국 죽게 되어 있고, 몸이라는 생물학적 기계는 날이 갈수록 소모(消耗)되니 사람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병으로 아프고 고통을 받게 된다. 모든 사람은 평생 동안 모든 사람을 짝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모든 사람을 배신하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니, 인간의 ‘감정(感情)’이 하는 중노동은 끝이 없고, 불쌍하며 처연하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도무지 어려우니,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즐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
‘나’와 ‘남’이 대립하여 싸울 때, 열심히 ‘남’을 욕하고 ‘나’를 욕하고 하면서 사는 것, 즉 ‘욕의 정치사회학’과 ‘욕의 인간학’의 차원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수많은 괴로움과 부딪힘 속에서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나는 욕하고 싸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네가 나쁜 놈’이고 ‘내가 나쁜 놈’이고를 떠나서, ‘나’와 ‘남’이 모두 인생의 절대적인 조건 하에서 똑같이 무력하고 막막한 존재로 서게 될 때에는, 우리가 ‘인생’과 ‘운명’ 그 자체를 한탄하고 욕하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욕하기 시작할 때, 그 욕이 나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많이 쓰였던 하나의 ‘욕’ 루트는, ‘우리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마구 욕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꼬인 것’은 잘못된 사회구조와 사회체제 때문」이라는 생각은 격렬하고 장렬한 사회혁명주의로 이어진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1917년 러시아혁명을 거쳐 20세기 중반과 후반 수많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약 200년간 이어진 ‘혁명의 시대’는 「민주주의 제도의 전면적인 확산과 기본적인 인권, 자유의 확보」라는 의미 있는 전리품을 남긴 채, ‘인간의 운명을 세상의 변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혁명적 열정(熱情)’ 자체는 이제 거의 식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중요한 ‘욕’ 루트에는 ‘탐닉(耽溺)’이 있다. ‘탐닉’은 ‘진지한 것에 대한 포기(抛棄)’와도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그냥 ‘뭔가’에 탐닉하고 그것으로 인생을 소비하는 것이다. ‘돈’에, ‘성공’에, ‘소비’에, ‘출세’에, ‘지위’에, ‘명예’에, ‘가족애’에, ‘취미생활’에, ‘오락’에 자기를 쏟아 부으면서 인생의 복잡함과 괴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이 ‘주인’이 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계속 달리는, 자본주의(資本主義)에는 사람들을 한쪽 방향의 탐닉으로 몰아대는 것이 그 본질적인 메커니즘으로 굳어버린 것 같다. 근대 이전 ‘사용가치(使用價値)의 세상’에서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가치들이 조금 더 인정될 수 있었는데, 근대 이후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세상’에서는 오직 달리고 달리고, 모으고 더 모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탐닉’의 루트는 모든 사람을 죽어라고 달리게 하지만, 몇몇의 선두주자들을 빼놓고는 상대적으로 뒤처진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패자(loser)라고 ‘욕’하고 버린다는 점(‘Winner takes all.’)에서 ‘인간의 운명적 좌절’에 대한 ‘보편적 처방’으로서의 문제와 한계가 있다. 그러니 탐닉으로 달리던 대부분의 사람,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짝사랑하는 ‘탐닉’ 그 자체로부터 냉정하고 찬바람 나는 욕을 얻어먹고는 다시 ‘인간의 운명의 한계’에 부딪히고 ‘탐닉’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하나의 ‘욕’ 루트는 사람이 ‘인생의 의미, 인생의 가치’ 자체를 욕(辱)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힘이 남아있는 한(限) 가장 하기 싫고 껄끄러운 길이다. ‘인간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욕(辱)하는’ 이 루트는 후술하듯 ‘신이 인간을 욕하는’ 종교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3. 신(神)의 인간(人間)에 대한 욕(辱)
3.1. 욕 잘 하는 신, 욕하는 하나님: ‘신’은 ‘욕’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욕한다. 기독교의 성경은 시종일관 ‘신의 사람에 대한 욕’으로 점철되어 있다. 태초의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다고, 신에게 댑다 욕을 먹고 동산에서 쫓겨났다. 그까짓 과일 하나가 무어라고? 사람이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죄냐고? 보통, 사람들은 사람이 죄인이 된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기분이 나쁘고 모욕을 당한 것으로 느낀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모태로부터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노래를 하는데, 이것도 인간으로서는 기분 나쁜 이야기이다. 내가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때부터 죄인(罪人)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고? 구약 예언서 이사야서에서 말라기서까지 17권 365페이지의 내용은 전부가 이스라엘과 주변민족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욕(辱)’으로 시종일관 채워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 신으로부터 욕먹는 것을 싫어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유물론자)의 입장에서는 성경에 씌어있는 ‘신의 인간에 대한 욕’ 전부가 듣기도 싫고 동의하기도 싫은 것이 당연하다. 무신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죄인이다. 당신은 죄인이다’라는 말이 가장 듣기가 싫고 기분이 나쁘다. 여기에다 마치 ‘나는 죄인이 아니고, 당신만 죄인이다’라는 듯한 전도자들의 교만한 표정과 태도는, 기분이 나쁠뿐더러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교만으로 느껴진다. 이에 더하여 ‘나는 천당 가고 당신은 지옥 갑니다.’라는 협박에까지 이르면, 나를 욕하는 신(神)도 싫지만, 그 권위에 힘입어 나를 모욕하고 협박하는 그 신의 신도(信徒)들이 더 미워진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유신론자,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욕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욕하는 내용으로 점철된 구약 예언서는 거북하고 부담스러워서 거의 주일예배의 설교 자료로 쓰이지를 않는다. 그리고 애들이 부모에게 칭찬만 듣고 혼나기는 싫어하는 것처럼, spoil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만 받으려고 하지 자기를 부인(否認)하기도 싫어하고, 세상의 영화를 쫓아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과 비판과 ‘욕’을 정색하고 듣기는 부담스러워 한다. 기독교의 교리 상 하나님의 욕을 전혀 안 듣는 척은 할 수 없으니, 요령피우는 애들처럼 ‘하나님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짧게 회개하고 금방 빨리 넘어가려고 한다. 신을 안 믿는 비기독교인들이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욕하는 이유의 상당부분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이 신의 얘기를 잘 안 듣고 잘 안 따르는 것’이니, 이것도 조금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신의 사람에 대한 욕’은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집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신의 인간에 대한 ‘짝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냉정하게 경쟁으로 우리를 몰아치고, 오직 결과로만 우리를 승자와 패자로 심판하고, 도무지 사정을 봐주려는 태도가 없는 ‘세상의 인간에 대한 욕(辱)’보다 조금은 더 위로가 되는 면이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으로부터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교회를 나가는 신기함에는, 이 점이 상당히 작용한다.
3.2. ‘믿음과 불신의 방정식(方程式)’ : 종교개혁가 칼빈은 그가 평생 동안 저술한 ‘기독교 강요(綱要)’ 상권에서, 「세상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인간에 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산수를 이용해서 ‘믿음과 불신의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인간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치를 100퍼센트로 보는 것」일 때에는 ‘신에 대한 지식’이 「신의 몫은 0퍼센트」로 되어 사람은 신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인간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치 100퍼센트」에서 「인간의 가치 70퍼센트」로 줄어들게 되면 그 줄어든 30퍼센트만큼 ‘신에 대한 지식’이 「신의 몫 30퍼센트」로 늘어나서 조금씩 신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인간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치 30퍼센트, 나아가 인간의 가치 0퍼센트」로까지 줄어들게 되면, 신에 대한 지식은 「신의 몫 70퍼센트, 나아가 신의 몫 100퍼센트」로까지 더 증가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더하기 빼기 1차방정식 산수이다. 칼빈의 설명을 조금만 더 밀고 나가면, 사람이 ‘인간의 가치’을 0퍼센트로 인식하는 순간 ‘신의 몫’은 100퍼센트가 되는데, 이 순간 없어졌던 ‘인간의 가치 퍼센트’는 ‘신의 몫 100퍼센트’ 속으로 부분집합처럼 쑤-욱 들어가서, ‘신의 몫 100퍼센트 속에서의 인간 가치 100퍼센트’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zero-sum 게임이 아닌 중첩적 공생모델로 형질전환(形質轉換)되어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하기 빼기를 뛰어넘는 고차방정식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아주 고개 끄덕일만한 설명이지만, 이 또한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또 다른 웬 꿩 구어 먹는 소리 비슷할 것이다.
어쨎든 사람이 무신론(유물론)에서 유신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사람의 두 가지 지식에 대한 칼빈의 위 산술적 설명」과, 「사람과 신 사이에 벌어지는 ‘욕의 작용’」을 연결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앞서본 바와 같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욕’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욕’으로 연결될 수 있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욕은 ‘세상에 대한 욕’ ‘탐닉을 통한 해결’의 길로 갈 수도 있지만, ‘인간의 존재의미 및 존재가치 자체에 대한 욕’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한 욕’은 칼빈 모형의 ‘인간에 대한 지식’에서 인간의 가치와 몫을 100퍼센트에서 70퍼센트, 30퍼센트, 0퍼센트로 줄이는 작용을 한다. 인간의 가치를 ‘조금’ 욕하면 절대자와 신의 존재가능성과 가치를 ‘조금’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가치를 ‘절반’만큼 욕하면 나의 인간적 능력과 신의 섭리가 ‘절반’씩 병행하는 수준의 인생관이 형성될 수 있으며, 인간의 가치를 ‘100퍼센트’ 욕해서 던져버리면 신의 몫을 ‘100퍼센트’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완전히 투항할 수 있게 된다.
인간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자립적이고 도무지 신을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 중, 큰 병이 나 본 사람, 경제적으로 쫄딱 망하거나 해서 인생을 무화(無化)시키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종교에 전폭적으로 열렬히 귀의하는 현상은, 그에게 인간의 운명이 가지는 가치가 0퍼센트, 채무초과의 파산상태로 빠져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아책임 없이 사회에 나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기 때문에 조금은 더 잘난 척하면서 뻐기고 다닐 수 있는 남자들에 비해서, 사실은 더 능력이 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모성적인 책임의 수행으로 인하여 사회적 노동이나 역할의 수행에 남자들보다 더 큰 제약을 받게 되어 인생의 가치와 칭찬과 보람을 충족하는데 애로를 겪는 이 시대의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독실하게 신을 믿고 교회를 다니기가 좀 더 쉬운 이유 또한, 칼빈에게서 배워온 이 ‘믿음과 불신의 방정식’으로 풀 수 있다. 가령 남자들에게는 ‘인생의 가치에 대한 평균값이 70’이라면, 여자들에게는 그 반대로 ‘인생의 가치에 대한 평균값이 30’ 정도 되기 때문이다.
신의 인간에 대한 욕은 ‘포기하라’는 것이고, 인간의 신에 대한 욕은 ‘포기하기 싫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욕은 ‘힘들다’는 것이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욕은 ‘죽겠다’는 것이다. ‘힘들지만, 죽겠다고는 하지 않고 견디는’ 사람들은 신에 투항하지 않는다. ‘힘들어서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혁명주의는 ‘세상을 뒤엎자’고 얘기하고, 물신주의는 ‘탐닉하고 달려라’고 유혹하지만, 신은 ‘포기하고 투항하라’고 ‘욕’한다. ‘사람을 욕할 것인가? 신을 욕할 것인가? 버틸 것인가? 투항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4. ‘욕의 종교학’ 사례연구 2건 – 개인의 삶과 욕/ 직장생활(사회생활)과 욕: 조금 어렵고, 힘이 들지만, ‘인간과 운명, 신과 종교’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인간의 운명에 대한 욕’, ‘인간의 신에 대한 욕’, ‘신의 인간에 대한 욕’에 대한 시론적 분석을 시도하여 보았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든, 갖지 않은 사람에게든 ‘믿음과 종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어지는 두 개의 글은 ‘욕의 종교학’과 관련한 일종의 사례연구, 케이스 스터디에 해당하는 글을 모아본 것이다 첫 번째 글 ‘그 후 20년’은 <한 개인의 인생>에서 세상이 가한 욕, 세상과 맞서 싸운 욕, 인생에 대한 욕과 종교적 믿음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정리한 내용이다. 70년대 아폴로의 달 착륙 직후 우주 붐에 영향을 받은 한 소년이 우주의 신비에 빠져서 ‘조그만 지구와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인간 세상(世上)의 지지고 볶는 모든 일’을 무상한 것이라고 무시하고 욕하면서 세상과 무관한 과학자가 될 꿈을 가졌다. 80년대에 대학생이 된 그 청년에게 ‘정치적 독재’의 세상(世上)은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손과 발을 묶는 방법’으로 그 청춘에 욕을 가했다. 소년에게 무시당했던 세상은 이런 의외의 방법으로 청년에게 반격을 가하였다.
세상(世上)이 가하는 욕에 굴복할 것인가 대항할 것인가? 청년은 벌벌 떨면서도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서 그 세상과 권력에 욕으로 대항하며 맞섰다. 세상에 대한 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세상이 매우 일상적인 것으로 바뀌고, 인생은 찌그러들었다. ‘세상에 대한 욕 충만’으로 인생의 가치 100퍼센트를 아낌없이 누렸던 인생이 의미도 없고 방향도 없는 20-30퍼센트의 인생으로 전락했다. 90년대의 30대 초보가장이 되어 직장에서 일 못 한다 욕을 먹고, 욕 안 먹으려 애를 써서 일하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찾기가 어렵다.
40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술과 담배로 마구 혹사당하고 욕먹던 그 자신의 몸이 ‘깜짝 병(Surprise Disease)을 만들어 그의 인생 전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는 치명적인 욕(辱)으로 반격을 하고 나섰다. 세상이 주는 욕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으나 몸이 주는 욕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인생을 끌고 나갈 힘도 어디로 갈지 방향도 다 잃어버린 것으로 파선(破船)한 그 사람은 ‘믿음과 불신의 방정식’에 따라 자기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신적 세계의 문턱 앞에 놓여진다...
두 번째 글 ‘인생(人生)의 버거움, 믿음으로 사는 법(法)-변호사의 업무, 직장생활과 믿음은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 관한 것이다. ‘세상(직장)이 인간의 삶에 가하는 욕들’이 어떤 내용들이고 어떤 성격의 것들인지, 세상과 직장이 가하는 욕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현실주의적이고 냉정하며 지혜롭게 대항하고 맞 욕을 하면서 버티어야 하는지, 생활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신앙의 원리와 현실적으로 연관시켜 본 시론적 글이다.
세상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세상 속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욕하고 흔들어버린다. 세상과 직장은 냉정하게 사람들을 다루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어리버리하면 가차 없이 욕을 해 버린다. 초보 인생, 초보 직장인들은 세상이 가하는 욕의 거칠고 냉혹 무자비함에 깜짝 놀라서 쫄고 세상이 가혹하다고 엄살을 부리면서, 질질 짜면서 세상과 직장과 직장상사들을 욕한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한 것이고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이고 내가 할 일을 못하면 내가 욕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세상과 직장이 나쁘다고 욕만 하면 ‘욕먹는 세상과 직장이 억울’해 진다.
부분적으로 좋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나쁘기도 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악하기도 하고 동시에 선하기도 한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 내가 빚을 받을 사람(채권자)인지 빚을 진 사람(채무자)인지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은 내가 욕을 먹어야 하는 입장인데, 남이 나를 욕하는 것만 미워하는 것은 바보짓이고, 오히려 나한테 고마울 수도 있는 고객이자 채권자인데 나를 push한다고 못된 사람이라고 계속 욕만 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부당하다.
세상과 직장이 나를 욕하고 시험하면, 그 욕과 시험을 고무판처럼 받아 안아서 뒤로 조금 뺐다가 강력한 반탄력으로 세상과 직장을 욕하고 거꾸로 시험에 빠뜨려야 한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신은 내내 세상과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무한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욕을 하고 있다. ‘욕의 보고(寶庫)’인 그 내용들을 잘 보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 세상의 욕에 눌리지 않고 세상을 대항해서 세상에 욕하며 살며 버틸 수 있는, ‘욕’의 기술과 비급, 무궁무진한 욕의 전략과 전술을 찾아낼 수 있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세상을 감당해 내고 세상을 대항하는 이 욕의 기술은 매우 유용하고 유익하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병주 칼럼]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 이병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