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013. 10. 1.부터 10. 16.까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희한한’ 인질극(Hostage)이 벌어졌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테러리스트’가 미국 시민을 인질로 잡고 미국 정부에게 정치적 요구조건을 내거는 장면처럼, 미국 하원의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들’이 미국의 연방정부폐쇄와 국가부도 가능성을 인질로 잡고 백악관에 요구조건을 내거는 정치적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1.2. 하원 공화당의 ‘요구조건’(ransom)은 2010. 3. 미국 상, 하 양원을 통과하여 2013. 10. 1.부터 시행되는 오바마 건강보험개혁법(Pat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 약칭 “ACA”)의 예산배제(defund)를 통한 실질적 폐기(repeal) 내지 시행연기였다. 정치적 위협의 수단(leverage)은 (i) 미국 양원 중 하원의 다수당인 공화당의 반대 하에서는 미국의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될 수 없어 연방정부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점(shutdown)과, (ii) 하원의 동의가 없으면 10월 17일로 임박한 정부부채한도 증액이 불가능하여 미국의 국가부도(default) 사태가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1.3. 본래 오바마케어 법안은 2010년 3월 미국 상 하 양원을 통과한 후 대통령의 서명을 통해 확정되었다. 이후 그 합헌성에 대한 일부 주 대법원의 사법적 도전이 있었으나 2012. 6. 28. 연방대법원의 합헌 판결을 받아 입법적, 행정적, 사법적 절차가 종료되고, 2013. 10. 1.부터 그 본격적인 시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현재 미국 양원 중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파이어서 하원만을 장악한 공화당으로서는 정식의 입법절차를 통해서 오바마케어 법안의 폐지(廢止) 법안을 상, 하 양원에서 통과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가사 상원까지 오바마케어 폐지법안을 통과시킨다고 하더라도 오마바 대통령이 법안 서명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에는 상, 하 양원에서 모두 2/3 이상의 폐지법안 찬성이 있어야 대통령 서명 없이도 법안이 통과될 수 있으므로, 미국 공화당이 적법한 입법절차를 통하여 오바마케어를 폐지하는 것은 현재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4. 2012년 말 미국 대통령선거 시 공화당 롬니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공화당이 상원 다수파를 차지하였더라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오바마케어를 폐기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12월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와 상원 선거에서 패배하여 오바마케어를 폐기할 정치적 기회를 상실하였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을 따라, ‘법의 길’을 통한 오바마케어 법안폐지절차가 불가능하게 되자, 하원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 강경파는 ‘주먹의 길’을 선택하여 ‘정부폐쇄와 국가부도’라는 ‘주먹’으로 백악관을 거칠게 위협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1.5. 미국 백악관과 민주당은, (i) 하원 다수당으로 예산과 입법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공화당의 위협에 굴복하여 오바마 대통령의 치적을 대표하는 법안(Signature Act)인 건강보험개혁법(Affordable Care Act)을 포기할 것인가, (ii) 아니면 공화당의 요구에 대항하여 연방정부 폐쇄의 혼란과 미국의 국가부도라는 세계적 재앙을 감수할 것인가 하는 양단간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공화당 하원의 다수파와 크루즈를 대표로 한 강경파 공화당 상원의원은 정부폐쇄가 실제로 이루어지면 백악관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했다.
1.6. 10월 1일 미국 연방정부의 폐쇄(shutdown)이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즉시 10월 17일로 예정된 국가부도 시한폭탄의 시계바늘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의외로 백악관은 ‘적법절차를 통하여 성립된 법안을 하원 다수파의 위협 때문에 철회한다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violation of constitution)으로 불가능하고, 미국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인질극(Hostage)의 대가(ransom)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오바마 건강보험개혁법 자체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팽팽한 의견을 보였던 미국 국민들도 막상 정부폐쇄가 현실화되고 국가부도의 위험이 눈앞에 다가오자 ‘국가의 운명을 볼모로 한 정치적 협박 게임’을 벌이고 있는 미국 공화당과 티파티 그룹에 대해 압도적인 반대여론으로 혐오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7. 명분 없는, 적법절차를 무시한 싸움을 벌인 하원 공화당의 강경파 의원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으로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는 보수정당의 지지기반인 월스트리트와 주류 재계는, 미국 경제의 재앙인 국가부도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원 공화당 의원들과 티파티의 행동양식에 경악하였다. ‘10월 17일 부채증액 시한을 넘겨도 국가부도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티파티와 공화당 강경파 일부 의원들의 주장에 어느 방송국 앵커는 ‘당신들은 어느 행성에 살고 있는가(What planet are you living on)?’라고 울부짖는 일까지 있었다.
1.8. 결국 상원은 다수파인 민주당과 소수파인 온건파 공화당 사이에 정부폐쇄와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적당한 합의안을 도출하였고, 사태를 주도한 하원 공화당은 아무 대책도 해결방안도 내놓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국가부도 위기 1일전인 2013년 10월 16일 밤 하원에서도 상원의 타협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정치적 인질사태는 일단락되었다.
1.9. ‘안정(安定)과 성장(成長)’을 모토로 하는 보수정당인 공화당이 도리어 ‘안정과 성장’을 볼모로 삼아 정치적 슬로건을 달성하려는 극단적 자해소동(suicide mission)을 벌인 것이다. 도대체 보수정당인 미국 공화당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 자기가 만든 ‘욕하는 괴물(怪物)’에게 잡아먹힌 미국 공화당
2.1.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고/욕으로 흥한 자 욕으로 망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번 공화당 사태는 1990년대부터 사반세기동안 ‘네오콘-기독교우파-티파티운동’으로 한 세대를 이어온 미국 공화당의 ‘욕(辱) 정치(Politics of Name calling)’ 내지 ‘증오 정치(Politics of Hate)’의 비극적 귀결이다. 문제의 비극성, 아니 역설적인 희극성(戱劇性)은 ‘선동하는 자’와 ‘선동 당하는 자’의 위치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역전되어, ‘말을 탄 자’가 ‘말’이 되고 ‘말’이 ‘말을 탄 자’가 되어 미국 공화당이 무정부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2.2.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하여 투표하는 현상 일반적인 상식에 의하면, ‘존재(存在)가 의식(意識)을 규정한다.’ 살 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보수적이 되고 살 만 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진보적이 되며, 재계와 상류층은 보수정당(미국은 공화당, 한국은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서민과 노동조합은 진보 내지 자유주의정당(미국/한국의 민주당 내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치상식이다. 세상은 이러한 정치상식의 원칙에 맞추어 돌아갈 때 오히려 안전하고 건강하고 예측가능하다.
그런데 정치와 세상에서는 수시로 아니 상시적으로 이런 상식이 전도되는 일이 발생한다. 하나의 예는 집단화된 지역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계층 일탈의 반(反)계급 투표 양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87년 이래 집단화된 지역감정이 압도적인 양상을 보이다가 최근 들어 연령별 계층별 투표양상이 나타나면서 다행히 지역감정이 다소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소련과 동구의 붕괴로 냉전이 사라진 후 1990년대 이후로 강력히 전개된 신보수주의(네오콘)과 기독교 복음주의 우파 정치의 ‘문화전쟁(Cultural War) 동맹’,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우파의 대중정치운동(grassroots movement)으로 전개된 티파티 운동을 통해서, 극단적이고 다소 당황스러운 정도로 존재와 의식의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이런 역전 현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지난 200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지역은 모두 민주당 지지로, 그 중간의 남부와 중서부 내륙지역은 모두 공화당 지지지역으로 선명하게 갈라져 분리된 것이다.
2.3. 문화전쟁(Cultural War)-기독교우파와 공화당의 동맹/일체화(一體化): 미국 공화당은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낙태 반대’와 ‘동성결혼 반대’를 핵심 슬로건으로 하는 이른바 문화전쟁(Cultural War)을 벌여 기독교 우파(Christian Right) 진영을 정치적 지지세력으로 결집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정치적 책략의 성공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생명을 존중하는 낙태반대운동과 가족의 가치를 보존하자는 동성결혼 반대운동이 공화당의 브랜드가 되면서 공화당은 ‘가치(Value)’를 존중하는 세력이 되고, 낙태와 동성결혼에 대해 허용적 태도를 보이는 민주당은 가치를 파괴하는 세력이라는 라벨을 붙이는데 성공하였다.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동성연애 금지의 율법을 지키자는 공화당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당이고 동성연애 금지를 주장하지 않는 민주당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당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문화전쟁의 결과 독실한 미국 남부와 중서부 시골지역(rural)의 백인들은 낙태반대, 동성결혼 반대, 가족의 가치 우선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공화당 후보들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부자’와 ‘평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목수 출신의 예수님에게서 ‘친기업 보수정당’만을 열성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정치적 당파성을 도출할 수는 없어 보이는데... ‘낙태와 동성애’라는 두 가지 이슈만으로 기독교와 공화당이 한 몸이 되는 정치적, 종교적 기적(奇績)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기독교 우파의 종교지도자들은 공화당의 품안에 몸을 던지고, 공화당은 기독교 우파의 품안에 몸을 던져, 서로 한 몸이 되었다. 그 결과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돌아온 탕자(Prodigal Son)' 이미지의 George W. Bush 공화당 후보가 미국 남부와 중서부 백인 기독교 신자들의 열성적인 지지 하에 당선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선거권자의 23%를 차지하는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ngelical voters) 중 68%가 2000년 선거에서 부시를 지지하였고 2004년에는 그 지지율이 78%로 증가하였다. 이는 전체 선거권자로 보면 무려 2%의 지지율 증가를 가져온다.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 표가 각각 50% 전후로 팽팽하여, 차이가 커봐야 2~3%의 근소한 차이로 승패가 결정되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기독교 우파 평민들의 지지는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는 공화당 정치인들 사이에서 종교적 부흥(revival)을 경험한다. 21세기에 들어와 공화당 정치인들은 누구나 ‘성경’을 손에 들고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정말로 진지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2.4. 사라 페일린(Sarah Palin) 열풍과 티파티 운동(Tea Party Movement): 2008년 중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Black Kennedy’라고 불리는 흑인출신의 젊은 오바마 후보를 통하여 열광적인 대중동원에 성공하였다. 이에 비하여, 월남전 전쟁영웅 출신의 합리적인 비당파주의자(Maverick) 매케인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공화당은 대중적 열기의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공화당지지 대중의 열기를 불러일으킬 깜짝 카드로 무명인사 알라스카 주지사 사라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로,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주지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사라 페일린은, 미국 남부와 중서부 기독교우파 성향 서민들의 영웅이 되어 공화당 지지열기의 불꽃을 피우는데 적격이었다. 순식간에 미국 공화당 선거운동의 주인공은 대통령 후보 매케인이 아닌 부통령 후보 사라 페일린이 되었다. 미국 공화당 기층대중운동(grassroots movement)의 영웅 사라 페일린은 민주당 오바마 후보에 대한 ‘욕쟁이’의 역할을 맡아서 점잖은 인품의 매케인 대신 유세장마다 다니면서 오바마를 ‘테러리스트의 친구(palling around with terrorist)’, ‘미국식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He is not a man who sees America as you and I see)’라고 사정없이 욕해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많은 페일린 유세장에서, ‘선동된 사람들’이 오바마에 대하여 “Kill him!”이라고 외치는 ‘극단적 증오 정치’의 흐름이 나타나게 된다. 2008년 선거운동에서 사라 페일린은 과도한 공격성과 정치적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오바마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으나, 오히려 공화당 지지세력 내부에서는 공화당 평민대중의 영웅으로 자리잡게 된다.
2008년 선거운동에서 사라 페일린 열풍으로 결집된 공화당의 대중운동은, 2009년 이후 티파티 운동이라는 공화당 대중운동으로 조직화된다. 이후 대부호인 캔자스 기반 석유재벌 코흐 브라더스(Koch Brothers)의 재력까지 결합된 티파티 운동은 2010년 의회선거,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들의 당내 지명과 당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현재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 230명 중 적어도 80명 정도는 티파티 운동의 절대적인 영향권 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티파티 운동의 핵심 강령(agenda)는 감세(Tax Cut), 오바마 건강보험법 반대, 이민법 개혁 반대이고, 티파티 지지자들은 그들의 강경한 입장에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온건파 공화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이른바 RINO(Republican In the Name Only)' 즉 ‘이름만 공화당원’이라고 공격하면서 곳곳의 공화당 후보 지명과정(primary)에서 탈락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티파티 운동은 낙태반대, 동성결혼반대를 주 이념으로 공화당과 결합한 기도교우파의 세속적 버전(Secular Version)으로 평가할 수 있다. 통계상 티파티 운동 지지자 중 복음주의자(Born-Again Christian)를 자처하는 사람의 비율은 44%로 전체 미국인의 35% 비율보다 조금 높은 정도이지만, 티파티 운동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시에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자처한다는 점에서, 티파티 운동과 기독교우파 정치운동은 상호 동맹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우파운동의 의제(Agneda)는 명분상 낙태, 동성애 등 가치(Value)에 관한 것이어서 기독교우파가 감세(Tax cut) 등 세속적인 공화당 의제에 관한 직접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기가 다소 멋적었던 것에 비하여, 티파티 운동은 감세 등 세속적 의제를 대놓고 직접적으로 추진하는 운동을 벌임으로써, 공화당 후보들로 하여금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감세를’ 모순 없이 함께 들고 나설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이 점에서, 티파티 운동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기독교우파 정치운동의 외연을 더욱 크게 효과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5. ‘욕하는 정치’를 이용하다가, ‘선동된 사람’들이 만든 ‘욕하는 괴물’에게 잡아먹힌 공화당의 폭주(暴走): 미국 공화당은 2000년 이후 ‘욕하는 정치’의 덕을 크게 보았다. ‘낙태’와 ‘동성결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욕’하는 것을 신념으로 하는 기독교우파와의 일체화된 동맹관계를 통하여 미국 남부와 중서부 복음주의 기독교 대중의 열성적인 지지를 동원하지 못하였다면, 2000년과 2004년에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흑인 출신의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라 케냐라고 ‘욕’하는 이른바 ‘Birther’ 이론을 신봉하고, 증세정책과 건강보험법은 사회주의(socialist) 정책으로 미국 자본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욕’하는 것을 일생의 신념으로 하는 티파티 운동이 없었다면, 2008년 미국경제 몰락의 책임이 있는 미국 공화당이 2010년과 2012년의 의회 선거에서 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욕하는 정치’에 의하여 선동된 사람들이 조직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선동한 사람들이 선동된 사람들의 표를 이용하여 정치적 이익을 누리고 나서 그들에게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원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욕하는 정치를 통하여 증오로 선동된 사람들’이 마침내 ‘티파티 운동’이라는 캠페인 조직으로 조직화되자, 미국 공화당은 선동된 사람들의 증오감정에 떠밀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번 정부폐쇄 사태를 통하여 미국 공화당 강경파와 티파티운동은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에 가장 위험한 극단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집단으로 지목되었다.
이것은 보수정당 공화당의 전통적인 브랜드인 ‘안정과 성장, 감정보다는 이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훼손한 것으로, 공화당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fatal) 것이 아닐 수 없다. 2013년 10월 현재의 미국 공화당은 ‘shutdown’, ‘default’, ‘insane’, ‘suicide’ ‘hostage’ 등의 단어와 링크되어 ‘안정과 성장을 위협하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국내외적으로 각인시켰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오바마케어를 욕하는 자’였는데, 이제는 ‘셧다운과 디폴트로 욕먹는 자’로 전락하였다. 앞으로 상당한 기간, 적으면 수년간 길면 수십년간 미국 공화당응 이 실패와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겨운 씨름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파티 운동 지지자들은 셧다운과 디폴트를 막는 상원 타협안을 만들고 그에 찬성한 공화당 상원의원 27명과 공화당 하원의원 87명을 명목적 공화당원 즉 RINO(Republican In the Name Only)로 지목하면서 향후 당내 후보지명과정에서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런 위협 하에서는 미국 공화당의 합리적인 보수파들조차도 ‘티파티 운동에게 욕먹는 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합리적인 행동과 발언을 할 수 없게 된다. 미국 공화당은 자기가 만든 ‘욕하는 괴물’에 잡아먹혀서 오도가도 못 하는 처지에 빠져버렸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욕으로 흥한 자가 욕으로 망해 버리는’ 비참한 모습을, 세계 최강 미국 수도에서 벌어진 정치적 인질극을 통하여 우리는 물론 전세계가 목도하게 된 것이다.
3. 거짓증거하지 말라! – 사람을 해치고 세상을 망치는 ‘욕(辱)’
3.1.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는 기독교 십계명 중의 일곱 번째의 제7계명이다(출애굽기 20:16). ‘거짓증거’는 그냥 거짓말과는 달리, 다른 사람을 심판(審判)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제7계명이 금지하는 거짓증거 행위’는 최협의(最俠義)로 법원에서 형사재판의 증인대에 섰을 때의 위증행위(perjury)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분야로는(field) ‘거짓진술과 거짓된 욕’으로 정치적 심판, 사회적 심판과 종교적 심판 등 다양한 심판의 장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을 포함하고, 절차적으로는(procedure) ‘거짓된 의도와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명예훼손, 모욕, 고소고발, 기소, 판결하고 처벌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광의(廣義)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2. 사실(fact)에 대한 거짓증거와 규범적 의미(meaning)에 대한 거짓증거 일차원적인 거짓증거는 ‘사실의 존재 여부’를 바꾸어 주장하거나 ‘조그만 사실’을 ‘큰 사실로 부풀려’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이고, 이차원적인 거짓증거는 ‘존재하는 사실’의 의미와 그에 대한 규범적 평가를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카페’가 20만명의 회원을 모으고 무려 3년동안 가수 타블로의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사실이 허위라고 집요하게 주장한 것, 미국 부시정부가 확인되지 않은 대량살상무기(Weapon of Mass Destruction, 약칭 “WMD”)가 확실하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한 것은, 각각 사회적 심판의 장과 정치적 심판의 장에서 벌어진 ‘사실’에 대한 거짓증거에 해당한다.
‘규범적 의미’에 대한 거짓증거에 관해서는 사회적 정치적 관점의 차이와 당파성이 반영되므로, ‘정당한 이견(異見)’과 ‘거짓증거’ 간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따라서 의미에 대한 ‘거짓증거’는 ‘정파적 이견’으로 포장되어 빈번히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1년째 지겹게 계속되고 있는 ‘NLL 포기 발언 논란’은 ‘거짓증거라는 주장’과 ‘정당한 비판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해악이 크고 범죄적 결과가 치명적이었던 ‘규범적 의미에 대한 거짓증거’ 중에는 당파적 입장을 초월하여 반론의 여지없이 그 실체가 드러난 일이 다수 있다. ‘아리안족의 우월성과 열등민족설의 선전을 통하여 유대인을 학살한 나찌 정부의 흑색선전’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하여, ‘광주시민의 민주화항쟁을 북한 간첩의 선동이라고 주장한 전두환 정권의 허위선전’은 우리나라 법원의 유죄판결 선고를 통하여 그 실체가 드러난 좋은 사례이다. ‘이웃과 상대방 정파를 증오할 것’을 가르치는 증오정치(Politics of Hate)의 대부분은 규범적 의미에 대한 거짓증거를 무기로 활용한다.
3.3.거짓증거로 선동하는 사람의 행위의 동기 – '자기 이익에 대한 욕심'과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에 대한 경멸/무시': 거짓증거로 선동하는 사람의 행위 동기는 ‘자기 이익에 대한 욕심’과 ‘타인의 존재가치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다. 정치공학에 의한 거짓증거 선동은 정치적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려는 정치적 이익에 대한 욕심이 동기로 되고, 정치적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경멸 내지 두려움과 증오가 그 증폭의 원인이 된다.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야당지지자들을 모두 종북세력, 비애국세력으로 몰아 척결하자는 일부 극우세력의 주장이 그 극단적 사례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흔하게 벌어지는 언론기사에 의한 여론재판은 언론사와 기자들의 이익 추구와 피해자의 인격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이 그 동기로 되고, 타진요 사태와 같은 인터넷 허위 악플사태 또한 집단주의와 익명성에 숨어서 무형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피해자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감정이 그 원인으로 된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욕)하는 자와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를 지목하여 규탄한 것(마태복음 5:22)은 거짓증거의 대상인 타인의 존재와 존엄성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행위에 못지않은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타진요’ 주동자가 결국 구속되어 인격살인행위에 근접한 인터넷 악플 행동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이번 미국의 셧다운 사태를 통하여 정치공학의 한계가 드러나고 욕하는 선동정치의 치명적인 실패와 위험성이 만천하에 노정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둠 속에 숨어서 음모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이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결국 자기의 꾀에 자기가 넘어가서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니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민주주의를 해치는 정치적 거짓증거는 계속되고 있고 사회적 거짓증거도 그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4년 전에 죽은 전직 대통령이 무려 1년째 계속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듯 정치적 욕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매우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혼란스럽게 치고받고 있는 중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직전 국정원장이 특정 정당을 지목하여 집단적 욕 공작(工作)을 벌인 댓글사건으로 구속되어 법원의 엄격한 재판을 받고 있으며,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힘입어 그에 관한 행정부 내부의 권위주의적 일사분란조차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정치공학의 유한성과 정치적 거짓증거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함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나마 상당히 안심되는 발전적 측면이다.
세상에 사람의 욕심이 있고 미움이 있고 정치적 싸움이 있는 한 정치공학은 계속될 것이고 거짓증거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력도 유한하고(권불오년) 민주주의 발전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거짓증거의 파워와 지속기간 또한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고 상해를 입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고 그런 상처는 사후구제로도 완벽히 아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누구도 거짓증거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사회적, 일상적 거짓증거를 없애고 줄이는 싸움과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진지하고도 필수적인 의무가 될 것이다. 또한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는 나와 우리 자신이 결코 ‘거짓증거를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사람들이 거짓증거에 쉽게 속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이유 –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고 싶은 인간의 욕망
4.1. 티파티 운동 지지자들 –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하여 투표하는가: 다시 잠깐 미국으로 돌아가 본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프랭크는 그의 저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하여 투표하는가(원제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2012년 갈라파고스출판사 번역출간)’라는 책에서 미국 남부 및 중서부 보통사람들의 공화당지지 반계급투표 현상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행하고 있다. 이 책은 캔자스 지역 중소도시 및 농촌 지역의 백인 근로계층 서민들이 그들의 계층적 이익에 반하여 ‘기업을 위한 감세정책’을 위주로 한 보수주의 공화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양상과 원인,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복음주의의 영향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어서, 비록 티파티 운동이 발생한 2009년보다 5년 전인 2004년에 쓰여진 것이지만 이 책은 티파티 운동에 대한 적절한 분석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부시대통령이 2000년에 당선되고 2004년에 다시 당선되기 직전에 씌어진 시간적 배경을 반영하여, 공화당의 빈곤층에 대한 정치공작의 성공에 압도당하고 클린턴의 중도화 전략으로 근로계층에 대한 정치적 호소력을 상실한 민주당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다소 비관적인 분위기를 깔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민주당이 우경화 전략을 탈피하여 근로계층에 대한 호소력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미국 남부 및 중서부 백인 근로계층이 공화당 지지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계급적 정체성(identity)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백인 근로계층이 티파티 운동을 통하여 공화당의 열성 지지기반으로, 나아가서 기성 공화당을 좌지우지하는 핵심주주로까지 부상하고 있는 현상에는, 단순히 ‘정치적 선동에 속은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이것은 ‘수동적인 속음(passively deceived)’이 아니라 ‘적극적인 속음(voluntarily deceived)’의 요소이다. 즉 ‘어리석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알면서 속는 것’이다. ‘알면서 속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고 이익이 있다. 그 ‘이익’은 무엇일까? 경제적 이익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만이 사람의 정치적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티파티 운동을 통하여, 자기들과 일체화되는 사라 페일린 등 티파티 정치인들의 과격한 발언을 통하여, 세상의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세상을 욕하고 정죄하는 ‘심판자의 지위’를 누리고 향유하는 ‘거대한 이익과 만족’을 얻는 것이다.
세상의 선악을 판단하는 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부유층 감세와 복지 감소를 통하여 조금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이런들 저런들 사는 것에 큰 차이야 있겠는가? 내가 옳고 타인은 정죄할 수 있는 자리를 누릴 수 있다면, 티파티 운동에 돈을 대는 코흐 브라더스(Koch Brothers)와 같은 석유재벌에게 조금 이용당해도 상관없다. 그들도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도 그의 돈을 이용하면 되니까. 사실 낙태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동성애를 허용하든 말든 우리의 인생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우리는 낙태찬성론자와 동성결혼 허용론자를 온 마음과 온 힘과 온 정성으로 소리 높여 반대하고 미워할 수 있다. '그들은 악하고 우리는 선하다'는 점만 유지될 수 있다면. 따라서 개별 의제(Agenda)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권력만이 중요하다.
2013년 10월의 셧다운 사태로 티파티운동 지지자들이 전체 여론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더라도, 티파티 운동 지지자들은 공화당 내부에서 그들이 획득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자리, 진정한 공화당원과 이름만 공화당원(RINO-Republican In the Name Only)를 구별하는 권한’을 결코 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적 선거절차를 통해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정치적 괴물(Monster)’로 인하여 미국 공화당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혼란과 방황을 겪을 것이고, 미국 전체와 세계경제에도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위험이 계속될 것이다.
티파티 운동 지지자들의 문제점, 즉 ‘집단적 거짓증거로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은 다른 정치적, 사회적 거짓증거, 사람을 해치고 세상을 망치는 ‘욕’과 동일한 원인과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의 나찌즘에 넘어간 독일 민중은 ‘아리안족의 선(善)한 우월성’이라는 거짓증거에 자발적으로 속아 세상의 심판자가 되어 ‘열등하고 악(惡)한 유대인과 집시, 장애인들’을 집단적으로 ‘욕’하면서 학살하는 심판행위를 집단적으로 저질렀다. 타진요의 운영자에게 속고 동조한 20만명의 익명 회원들은, 집단의 힘으로 가수 타블로를 ‘욕’하고 정죄하면서 그에게 마구 돌을 던지는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실제로 법적인 힘을 가지고 정죄와 심판의 권력을 가진 현실의 권력기관들과 그 구성원들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권한’을 자신의 개인적, 집단적 이익을 위하여 남용하려는 유혹이 더욱 크다.
4.2. 기독교우파 (Christian Right) - ‘선악과를 따먹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기독교인’: 나 또한 2000년대 초반, 30대 후반에 중생한 독실한 크리스챤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 대부분 및 다수의 교회가 왜 공화당이나 한나라당 같은 보수정당만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가 하는 문제가, 오랫동안 가장 고민스럽고 풀기 어려운, 매우 큰 신앙적 숙제 중의 하나였다. 미국은 통계상으로 중생한 백인 기독교인의 78%가 공화당을 지지하여 복음주의 진영의 보수당 지지가 압도적이고, 우리나라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개신교의 경우 모든 선거와 사학법 개정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자유주의 정당 내지 진보정당을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동성애와 낙태 문제’를 주 이슈로 하는 미국 기독교 우파의 경우와, ‘반공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는 한국 기독교의 경우는 조금 그 성격이 다르므로, 두 경우를 나누어서 분설(分說)해 본다.
우선 동성애와 낙태 문제로 공화당을 열성지지하고 민주당을 싫어하는 미국 기독교 우파에 대해서 살펴본다. 구약의 율법은 남자간의 동성애를 사형당해야 하는 죄의 하나로 명시하고 있고(레위기 20;13), 신약성경도 바울의 로마서에서 동성애를 잘못된 일로 명시하고 있다(로마서 1:26-27). 낙태 문제는 태아의 생명을 인정하고 낙태를 태아의 생명에 대한 살인으로 인정한다는 법적 기초를 기본적 전제로 공유한 상태에서, (i) 어느 시점부터 ‘생명을 가진 태아’로 인정할 것인가와 (ii) ‘어느 기간, 어떤 상황에서 예외적인 낙태를 인정할 것인가’하는 법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에 태아의 생명성을 인정하고, 예외적인 낙태허용을 최대한 허용하지 않으려는’ 원칙주의적 입장과 임부의 자유와 현실적 필요성 등을 주안점으로 하여 가급적 유연하게 낙태를 허용하자는 자유주의적 입장이 다투고 있다. 성경에는 싸움 중 과실로 낙태케 한 자에 대해서 벌금배상의무를 규정한 구절이 있고(출애굽기 21:22), 세례 요한이 모친의 복중에서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구절(누가복음 1:15)이 있지만 이 구절들은 낙태논쟁의 이슈인 낙태가 죄가 되는 시점, 즉 태아 생명의 시작시점을 분명히 다루고 있지는 않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복중에 짓기 전에 예레미야를 이미 알았다(예레미야 1:5)’는 구절이 잉태 이전부터 사람이 하나님의 인식대상이 된다는 것으로 태아의 생명성을 앞으로 당기는 성경적 근거로 논의되지만, 이 구절을 문언대로 해석하면 아예 ‘잉태(수정) 이전의 정자, 난자 시절 또는 그 이전부터 사람이 하나님의 인식대상이 된다’는 내용이므로, 낙태죄의 논쟁에 직접 적용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어찌되었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동성애를 허용하고 동성결혼제도를 인정해서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성경이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또한 낙태문제와 관련해서도 가능하다면 가급적 수정 이후로 세포분열이 진행되는 가장 빠른 시점부터 태아의 생명성이 인정되고 그 생명이 보호되는 것이 좋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별로 반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동성애 반대와 낙태 반대가 과연 기독교의 핵심이고 전부이냐?”라는 것이다. 진지하게 살피건대 기독교의 핵심이고 전부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고(마태복음 22:35-40;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동성애 반대와 낙태금지’가 이를 대체하는 기독교의 절대강령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당시 율법상 죄인으로 취급되던 세리 및 창녀와 함께 앉아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고, 누가복음 18:9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규탄한 바 있다. 그러므로 동성애반대와 낙태반대를 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강령에 부합한다면 기독교적인 것이지만, 동성애반대와 낙태반대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강령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로 예수님의 규탄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미국의 기독교 우파는 최근 2013. 9. 19. 카톨릭 신임교황 프란체스코의 인터뷰 내용처럼 동성애, 낙태문제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Church Is ‘Obsessed’ With Gays, Abortion and Birth Control”),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을 잊어버리거나 경시하고 (복지 반대, 건강보험법 결사반대), 동성애나 낙태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기독교의 적으로 돌려세움으로써,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성경에서 인간의 원죄(original)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고, 인간의 뜻으로 오만하게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고, 예수가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그릇된 선악판단(재판)의 결과’로서, 예수의 십자가 나무는 에덴동산의 선각과 나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오만한 선악 판단’에 대한 ‘Stop’ 사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정치적 분쟁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동성애'와 '낙태’라는 두 가지 렌즈 만을 통하여 ‘개인과 집단의 종교적 옳고 그름, 도덕적 옳고 그름, 정치적 옳고 그름’을 ‘심판하고 정죄하려는’ 미국의 기독교 우파 정치운동의 진정한 동기와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고 ‘종교의 이름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인간의 종교적 야심과 욕망’의 결과가 아닐까?
이러한 문제점은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도 조금 다르지만 유사하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는 아직 동성애, 낙태 문제가 핵심 현안으로 부상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 그리고 공산주의의 북한 기독교 탄압경험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반공‧반북, 반자유주의, 반진보’ 이데올로기가 주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상 인본주의(人本主義), 즉 인간의 자기의(自己義) 추구의 극단적 최고봉이라고 볼 수 있는 공산주의(共産主義)의 폭력성을 뼈아프게 경험한 한국 개신교가,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적 정의(正義) 주장에 대하여 ‘인간의 자기의(self-righteousness) 추구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간의 자기의(自己義) 추구’를 배격한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모든 종류의 정의(正義) 추구 행동’을 모두 배격하고 싫어하는 것은 넌센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반기독교적인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하면,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오만한 선악판단에 의한 자기의(自己義) 추구’를 배격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에 따라 겸손하게 행해지는 인간의 의로운 행동’을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독교 강령은, ‘하나님 없는 이웃 사랑’의 한계를 지적하고 반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이웃 사랑’은 기독교인의 핵심 강령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확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의 확대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요구이지 기독교인이 반대할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보수주의 정당 지지자와 자유주의, 진보정당 지지자를 모두 사랑하며, 정의와 평화와 복지와 성장이 함께 이루어지기를 원하시지, 그 중 한 가지 입장만 편벽되게 지지하고 다른 쪽을 미워하고 배격하실 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쉽고 빠르게 선악판단에 뛰어드는 오만한 기독교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잘 살펴보고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 고통과 원망(願望)들을 깊이 고민하면서, ‘그 시대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영적, 사회적, 정치적 이웃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겸손하게 궁리하고 지혜롭게 그 실천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겸손하고 진지한 기독교의 길이 아닐까?
5. 결 론 –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5.1. 2013년 10월 미국과 세계경제를 공포로 몰아넣은 미국의 정부폐쇄와 국가부도 위기 사태의 전말(顚末)은, 선동적 정치공학의 실패와 정치적 거짓증거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 것으로서, 오히려 미국은 물론 세계 전체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사건으로 보인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번 사태를 통하여 진보나 보수나 절제 없는 선동정치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충분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5.2. 우리나라는? 아직도 독재시대의 선동적 정치공학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복고적 행태가 전개되고 있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전통적 거짓증거와 정보사회의 신종 거짓증거들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수십년동안 축적된 민주주의의 힘으로 전통적, 복고적 선동정치, 거짓증거의 위력이 제한적이고 비영속적인 것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 등을 통한 신종 거짓증거에 대해서도 제도적으로, 경험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신원(伸寃)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가해자들이 처벌을 두려워 떠는 일들이 생기고 있다. 즉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거짓증거를 하는 사람이나 집단들이 영원히 승리하지는 못하고, 일시적인 성공 이후에는 그 대가를 받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5.3. 세상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요만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사람 간의 싸움과 미움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고 세상을 망치는 거짓증거를 하는 일은 결코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안타깝게도, 무리하게 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는 기도는 또 다른 악과 더 큰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5.4.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실패에 단념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는 세상의 외부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는 정치적, 사회적, 일상적 ‘거짓증거의 희생자’로 될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고의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거짓증거하는 가해자’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 또한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적극적인 개선뿐 아니라 나와 우리의 삶을 소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나와 우리와 이웃의 고통을 더 적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5.5.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우리가 ‘거짓증거를 하고 거짓증거를 당하는’ 주된 이유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과 함께,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나를 선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오만한 욕망’이다. 둘 다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생각건대 두 가지 중에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고 익숙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보다, 더 광오하고 무모하며 예측불가능하게 전개되는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만한 욕망’이 더 큰 해악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욕심을 버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나는 선하고 타인은 악하다는 심판자의 오만한 자리에 앉으려는 태도와 유혹'을 우리가 절제하거나 포기한다면, 그래서 의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해치고 세상을 해치는 거짓증거를 할 유혹을 우리가 멀리한다면, 나와 우리와 이웃의 고통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타인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다. 타인과 상대방의 존재와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를 배척하고 해치고 없애려는 거짓증거가 가능해 진다. 그러나 타인과 상대방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한다면, 함부로 거짓증거를 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 드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병주 칼럼]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3, 2013년 11월, 이병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