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8-07 18:07
중국, 중국인 (12): 면면히 이어져 온 중국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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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 (12): 면면히 이어져 온 중국

우리가 중국에 대해 논의할 때, 우리가 말하는 중국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의 주권국가인가? 중국이 하나의 주권국가로 여겨지게 된 것은 매우 현대적인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권국가라는 층위로 중국의 풍부한 함의를 모두 담아내기는 어렵다. 거지앤슝(葛剑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이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어왔으며, 그것이 가리키는 범위도 완전히 달랐다.”(1)  그는 역사지리학의 관점에서 중국의 역사적인 통일과 분열 상황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의 강역에 관한 이론적 가설(구주오복(2)과 같은)과 역사적 변천(역대 중국의 영토 변화)에 대한 고찰을 강조한다.

거지앤슝은 “중국(中國)”이 포함하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먼저 “국(國)”은 원래 “성(城), 읍(邑)”을 가리키며, 성 바깥을 가리키는 “교(郊)”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다음으로 천자가 거하는 성(城)을 경사(京師)라고도 부르며, 이는 정치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중국(中國)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주(周) 성왕(成王) 때 낙읍(洛邑)을 세워 배도(陪都)로 삼았고, “천하의 중심”에 위치하였기에 마찬가지로 “중국”이라 불렸다. 이처럼 중국은 정치적 중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지리적 중심이라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중국에는 왕조의 통치 구역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중원 왕조의 주요 통치 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구역 바깥이 바로 “중국”이 아닌 이(夷), 적(狄), 만(蠻)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에는 민족문화적 의미도 있으며, “경제와 문화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한족의 집단거주구역 혹은 한족문화권”(3)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하여 볼 때, 거지앤슝은 역사 속의 중국을 역대 왕조와 동일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중원 지역이나 한족 거주지와도 동일시할 수 없으며, “우리가 명확하게 규정한 지리적 범위의 모든 정권과 민족을 포괄”하면서, “최후의 봉건제국——청조가 도달한 안정적인 최대의 강역을 범위”(4)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 점에서 거지앤슝은 역사지리학의 입장으로 돌아온다.

비록 중국의 본래 의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도 계속해서 변화가 발생하였지만, 문명으로서의 중국은 시종일관 하나의 원칙으로서 견지되어왔다. 춘추시기의 중국은 내적인 분열과 외적인 침략에 직면하였으며, 따라서 면면히 이어지는 중국이란 말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리적 영역에 얼마나 큰 변화가 발생하였든 간에, 문명 중국의 원칙은 여전히 면면히 이어져갔다. 그러나 거지앤슝은 화이론(華夷論)을 기초로 하는 전통적 천하관, 특히 유가의 천하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전통적인 구주(九州) 이론에서 중원을 문명의 중심으로 보았던 것이 단지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한 번도 중국에서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5) 전통적인 천하관, 특히 유가의 천하관은 한편으로 하늘 아래 온 세상을 “왕토(王土)”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천하(天下)”를 중원 왕조의 통치 아래에 놓인 영역, 그 중에서도 한족 문화의 집단거주지역으로 이해한다. 거지앤슝은 이러한 천하관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천하관”(6)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천하관에 내포된 화이의 구분이 종족이 아니라 문화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 또한 지적한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천하관의 물질적 기초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한다. “이론적으로 천하의 모든 것을 소유한 황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며, 또한 한족 문화권이나 농경지대 바깥으로 확장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 범위 바깥의 토지에서는 곡식이 생산되지 않으며, 나라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범위 바깥의 사람들은 예의를 알지 못하고, 여기에는 교화가 미치지 않는다.”(7)  이러한 상황은 중국 문명과 발달된 농경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창고가 풍족하고 예의를 알았기에, 전통 중국 문명은 바깥으로 확장해 나갈 필요도, 그럴 야심도 없었다. 외부에 대한 욕구가 없었기 때문에 북방 유목민족의 공세와는 달리, “농경민족은 일반적으로 장성을 축조하고, 관문을 막으며, 무역을 중단하고, 출입을 금하는 수세를 취했으며”, 이것은 자신의 “폐쇄적 영역”(8)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거지앤슝은 장성의 축조에 군사적 방어의 의미도 있지만, 보다 중대한 영향은 농경과 유목 사이의 경계를 고정시키고, 민족의 교류와 융합을 제한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민감하게 포착한다.(9) 

하지만 거지앤슝의 저서에서는 농경과 유목의 구분이 전통 중국의 역사 발전에 미친 중요한 의의에 대해 한발 더 나아가 심층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는 일찍부터 비교적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보다 풍부한 관점을 보여준다. 라티모어는 장성의 축조가 정치적으로 중국과 이민족을 구별하는 경계가 되었고, 나아가 “그것에는 특수한 사회적 목적이 있어서, 자신과 자신이 가로막아야 할 사회 사이를 구분하였다.” 다시 말해 장성 축조의 진정한 의미는 외부의 적을 막아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초원민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도 아니며, 남부 한족의 토지를 통제하고, “중국 내부 피정복지의 안정화와 새로운 사회 질서 건립” 을 꾀했던 것이다.(10) 장성은 중국과 이민족 사이의 경계로서, 농경을 기초로 하는 중국과 유목을 기초로 하는 초원 사이의 경계 지대를 가리킨다. 이 일대는 두 가지 생활이 혼합된 지대로, 때로는 중국의 규범이 우세를 점하고, 때로는 초원의 생활양식이 우세를 점한다. 중국이 만약 초원을 넘어서 지나치게 멀리 나아간다면, 중원에서 벗어나게 된다. 초원이 만약 중국으로 너무 깊이 침입하게 되면, 중국으로 동화된다. 이러한 경계의 완충지대에서만 두 가지 세력이 비로소 하나로 섞일 수 있다. 라티모어는 “혼합문화가 초원과 중국 사이의 교량이며, 양측은 이로부터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이 두 세계의 결합은 단지 교량의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교량의 양 끝에서 그들은 여전히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이다.”(11)  변경지역이 중국 문명 생활과 초원 유목 생활의 완충지대를 구성하였다는 라티모어의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 이 두 가지 생활양식은 전통적인 형태의 사회에서 일종의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갈등을 구성한다. 공업화 이전에 “중국과 초원은 조화될 수 없었다.” 이러한 갈등은 공업화 사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었다.(12)  이 말은 곧 전통 중국문명이 실제로 두 가지 요소의 긴장을 내포하며, 농경생활과 유목생활 사이의 긴장이 바로 그것이다.

라티모어의 이러한 관점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농부인 카인은 양치기 형제 아벨을 죽인 후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고, 지상을 유랑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은 유태인의 디아스포라이다. 중국의 운명은 이와 상반된다. 중국의 생활은 은총을 입은 대지 위에서 이루어지지, 저주 받은 토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인은 토지에 대해 모든 문명민족들 가운데 가장 강한 의존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원이든 농경이든, 모두 토지의 풍요에 의지한다. 중국 문명의 두 가지 중심지대——황하지대와 장강지대——중에서도 대지에 대한 의존을 드러내지 않는 곳은 없다. 비록 공업화가 초원생활과 중원문명을 통합하였으나, 대지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중화문명은 공업화의 충격에 대해 확실히 준비가 부족하다. 공업화와 함께 도래한 것은 바다로부터의 충격이다. 라티모어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해상 세력과 대륙 세력의 직접 충돌이 표출된 것”(13)이라고 간주한다. 해양세력의 지속적인 충돌과 공업화에 직면하여, 육지 세력으로서의 중국이 어떻게 문명의 생명력을 새로이 회복할 것인가? 막중한 짐을 지고 먼 길을 가야 할 것이 분명하다.

<주>
(1)  葛剑雄:《统一与分裂:中国历史的启示》,北京:商务印书馆,2013年,第18页。
(2) [역자주] 구주오복(九州五服)에서 구주(九州)는 고대 중국의 영토를 9개의 주로 구분하였던 것에 근거한 말이며, 오복(五服)은 고대 왕기(王畿) 바깥의 영역을 원근에 따라 5개의 구역으로 구분한 것을 가리킨다. 
(3) 葛剑雄:《统一与分裂》,第19-25页。
(4) 葛剑雄:《统一与分裂》,第27-28、68页。
(5) 葛剑雄:《统一与分裂》,第2-7页。
(6) 葛剑雄:《统一与分裂》,第11页。
(7) 葛剑雄:《统一与分裂》,第152-153页。
(8) 葛剑雄:《统一与分裂》,第93、119页。
(9) 葛剑雄:《统一与分裂》,第13页。
(10)拉铁摩尔:《中国的亚洲内陆边疆》,唐晓峰译,南京:江苏人民出版社,2010年,第299、303、307页。
(11) 拉铁摩尔:《中国的亚洲内陆边疆》,第376页。
(12) 拉铁摩尔:《中国的亚洲内陆边疆》,第40、376页。
(13) 拉铁摩尔:《中国的亚洲内陆边疆》,第6页。

<참고문헌>
葛剑雄:《统一与分裂:中国历史的启示》,北京:商务印书馆,2013年。285页
拉铁摩尔:《中国的亚洲内陆边疆》,唐晓峰译,南京:江苏人民出版社,2010年。431页。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중국, 중국인]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8, 2014년 8월, 천지앤홍(陈建洪), 중국 난카이 대학(南开大学) 철학과 교수; 이수현 옮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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