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쉼터 소장님이 돌아가셨다. 대단한 언론과 검찰이다. 이들의 무분별한 공명심이 모방하기도 힘든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그 분 삶의 어느 족적도 닮을 수 없는 염치없고 뻔뻔한 인간들이 정의를 독식하는 느낌이다. 참으로 부끄럽다.
냉철하게 돌아보자. 민족주의라는 열정도, 인권이라는 독점할 수 없는 원칙도, 모두 헤아리고 판단해 보자.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다는 관용의 원칙은 이런 판단 이후에 고려해 보자. 특히 오랜 시간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은 일에 누군가가 묵묵히 헌신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2.
피해자를 영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정 인물, 특정 집단에 대한 미화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 인간이다.'라는 말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분노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인 것이다.
일본은 1945년 항복이후 지금까지 피해자를 자처해왔다. 난징 학살이 의제로 등장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앞세웠고, 식민지 문제를 부각시키면 서구의 제국주의가 자행한 폭력들을 부각시켰고, 침략 전쟁을 지적하면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내세웠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주했던 수 많은 한국인들의 죽음을 일본 정부는 아직도 숨기고 있다.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죽음을 통해 일본인들이 지금껏 스스로는 태평양전쟁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점을 선전해 온 것과는 상반되는 행위다.
3.
존 다우어(John Dower)의 'Embracing Defeat'이라는 책에서 가져온 가토 에츠로의 만화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침략 전쟁에 대한 회환과 반성을 그려낸 것 같지만, 실은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는 전후 일본의 보수적 사고를 담아내고 있다. 미국은 원자폭탄과 같은 신무기를 개발해서 전쟁에 나섰는데, 일본은 고작 죽창을 들고 맞섰다는 것이다.
가토 에츠로는 1940년 '건설만화회'라는 조직을 꾸리고 전쟁지지만화를 그렸던 인물이다. 전후에는 제 2의 근대화를 통해 패배를 극복하자고 역설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오늘날 일본 극우의 뿌리다. 이들에게는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반인륜적 만행에 대한 성찰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4.
'힘이 없어서 침략당했다.'는 말은 '설사 힘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없으면 단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을 넘어 평화의 쉼터를 지켰던 소장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고, 그 분의 넋을 진지하게 추모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