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람들은 계속 싸웁니다. 최초에 카인과 아벨이 싸웠고, 카인의 후예들이 싸움을 했고,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싸움을 했고, 이삭의 아들인 야곱과 에서가 싸웠고, 야곱의 아들인 요셉과 열 명의 형들이 싸웠습니다. 애굽왕 바로와 히브리 백성이 싸우고,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 족속들이 싸우고, 앗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이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와 싸워서 멸망시켰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예수님과 싸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헤롯왕과 로마 황제들과 싸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라와 부족들이 계속 싸움과 전쟁을 했고, 중국, 일본 땅에 있는 나라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하고, 내부에서 옛 왕조와 새 왕조가, 동서남북 당파와 정파가, 양반과 노비와 농민이 끊임없이 싸움을 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과 싸우다 패해서 30여 년 간 식민지 생활을 하고, 일본에서 해방된 이후에는 남과 북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치명적이고 비극적인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후 남한에서는 독재와 민주주의 간에 수십 년 간 많은 사람의 목숨을 값으로 한 큰 싸움이 벌어졌고, 이제는 선거제도를 둘러싸고 정당과 정당이 돌아가면서 끝도 없이 말싸움을 합니다. 노조는 기업과, 보수는 진보와,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과 대립하고 맞서 싸웁니다.
1.2. 국제적으로는, 오랫동안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끝없는 싸움과 전쟁을 벌여왔고, 중세 이후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간의 종교적 싸움이 십자군전쟁과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그리고 중동전쟁을 넘어서 이제는 전세계적인 기독교진영과 이슬람교진영 간의 싸움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귀족정과 민주정의 싸움이 오랫동안 진행되다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어 싸움의 형태가 바뀌었고, 신분제적으로는 수천 년 간 인간을 족쇄 채우고 차별해 온 노예와 농노제도, 귀족과 양반의 신분제도도 프랑스 혁명 이후 200년의 혁명기 동안 거의 철폐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혁명의 싸움은 정치경제적 이념을 따라 자본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뉘어 여러 시기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피투성이 싸움을 벌였고, 20세기 말엽 마침내 보다 취약한 공산주의가 패배했습니다. 자본주의 내에서 살만 한 사람들과 살만 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싸움은 정치를 통하여, 선거를 통하여, ‘성장’과 ‘복지’라는 명분을 둘러싸고 줄기차게 진행됩니다.
싸움은 미움을 낳고, 미움은 더 폭력적인 싸움을 낳고, 더 폭력적인 싸움은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낳습니다. 이렇게 되니 세상은 끝없는 싸움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살고 싶지만, 우리가 사회적인 차원이든 개인적인 차원이든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1.3. 일반적으로도 정치적 사회적 분쟁은 사람들의 의견을 양극화시키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 간에 서로 말을 섞기도 쳐다보기도 꼴도 보기 싫어지도록 만드는, 마력인지 괴력인지 아주 고약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아이러니컬하거나 다소 서글프거나 아주 허망한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세상의 정치사회적 분쟁에 관해서 안 믿는 사람들과 거의 유사하거나 아니 똑같이 양극으로 갈라진 의견과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모임에서 거룩하게 또 은혜롭게 서로의 신앙을 나누다가, 정치 얘기가 나오면 똑같은 사람들이 ‘날 것 보수’와 ‘날 것 진보’로 완고한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을 모욕하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정치사회적 분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그토록 성실하고 진지하고 독실한 우리들의 신앙은 아무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더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이 정도로 애매하고 모호하고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이 땅의 싸움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것도 문제이고, 하나님을 이 땅의 싸움 바깥으로 밀어 올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죄와 이기심과 슬픔으로 가득한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상 분쟁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해와, 세상 분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깊고 더 높고 더 넓은 차원에서 실현해 나가는 실천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1.4. 이런 문제의식 하에, 이하에서는 인간세상의 싸움, 특히 정치사회적 분쟁과 관련하여 다음의 문제들을 함께 쭉~쭉 풀어보고자 합니다.
① 세상 : 싸움의 양상 (원인과 형태)
② 하나님 : 세상 분쟁 속의 하나님 - 하나님은 어디에?
③ 인간 : 세상 분쟁의 속의 사람 - 우리는 어떻게?
2. 싸움의 양상 (원인과 형태)
2.1. 싸움의 원인
2.1.1. 경제적 분쟁과 정치적 분쟁
정치사회적 분쟁의 원인을 평이하게 생각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신분적 자유와 자결’을 둘러싼 분쟁입니다. 두 가지 분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각자 독립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분쟁을 완전히 같은 뿌리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100퍼센트 정확하지는 않고, 전혀 별개의 독립된 것으로 보는 것 또한 지나치게 관념론적인 견해로 100퍼센트 타당하지는 않습니다.
2.1.2.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민사(民事) 분쟁으로 나타나고, 집단적 차원에서는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의 노사분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반독점 분쟁, 농민과 소상인 등 전통적이고 내국적인 산업과 수출기업 대기업 간에 벌어지는 반수입개방 분쟁 등 다양한 계층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원인으로 합니다.
경제이념적으로는 과거 100여년 정도는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시장경제주의와 사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간에 거대한 규모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경제체제로서의 공산주의가 사실상 붕괴된 지금의 시점에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제한 상태에서 ‘경제적 평등과 경제적 약자 보호’를 주된 목표로 하는 ‘복지주의’와 ‘경제적 산출량의 극대화와 국제경쟁력 유지’를 주된 목표로 하는 ‘성장주의’ 간에 경제이념적 대립과 분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은, 그 해결노력의 큰 방향 중 하나로서 정치적 조직화와 이해관계의 정치적 반영 및 관철을 추구합니다. 경제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담는 정치조직과 정당의 성격 및 모습은 시대의 단계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뒤엉켜 반전을 만들고 또 사회의 이념적 지형에 따라 왜곡되기도 해서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초반 현재의 시점에서 극도로 단순화하자면, 대체로 살 만 하다고 생각하고 성장을 중시하는 보수층이 지지하는 ‘보수정당’과, 대체로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서민과 노동자층이 지지하는 ‘자유주의 정당 내지 진보정당’으로 나누어집니다. 서민과 노동자층이 지지하는 정당은 사회의 정치지형과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상대적으로 노동조합이 강한 서구의 경우에는 노동조합 기반의 진보정당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독일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사회당, 영국의 노동당 등)이, 상대적으로 노동조합이 약한 미국과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당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망하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헤게머니가 강해진 현재의 시점에서는 유럽 사회민주당과 미국/한국의 민주당 간의 이념적 차이점보다는 ‘대체로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계층의 정당’이라는 지지계층의 동일성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1.3. 정치적/신분적 자유(自由)와 자결(自決)을 둘러싼 분쟁
정치적 분쟁의 원인에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고 정책적으로 실천되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경제적 이익과 계층적/계급적 이익이 ‘전부 다’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분쟁을 발생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정치적/신분적 ‘자유(自由)’와 ‘자결(自決)’입니다. 자유/자결에는 경제적 이익과 긴밀히 연관된 점이 있지만, 인간의 인격적 측면에서 경제적 이익과 분리되거나 독립적 인 성격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자유’, ‘자결’을 경제적 분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본성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빵으로 살지만,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치욕적인 것도 참는다.’는 것이 인간의 진실 중 하나이지만, ‘자유를 잃고 남의 권력과 지시에 굴종하는 것은, 밥을 굶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또한 우리들 인간의 중요한 진실입니다.
왕과 귀족의 주권을 국민 다수(모두)의 주권으로 바꾼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혁명, 타 민족의 모욕적 지배와 폭압으로 빼앗긴 자유를 찾기 위한 식민지 독립운동, 흑인 노예제와 차별을 없앤 미국 남북전쟁과 1960년대 인권운동, 높은 경제성장으로 엄청나게 더 많은 빵을 만들게 하기는 했지만 국민의 주권(主權)을 빼앗고 단 한 마디라도 자기를 욕하는 국민은 체포하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던 유신체제와 5공 독재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주화투쟁은 모두 정치적/신분적 자유와 자결을 찾기 위한 분쟁이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정치적/신분적 자유가 확대되어 나가는 여러 단계와 과정에서, 이 싸움의 양상은 다양하게 달라지고 반전됩니다. 프랑스대혁명을 이룬 산업자본계급과 평민들은 이후 다시 좌파 자코뱅과 우파 지롱드로 나뉘어 사회의 방향을 둘러싸고 100년 가까이 큰 싸움을 벌였고, 미국의 공화당은 19세기 말에는 노예해방운동의 주역이었다가 20세기 중후반에는 인권운동의 대척점에 있는 보수정당이 되고 미국 민주당은 19세기 말에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 노예농장 기반의 정당이었다가 20세기 후반에는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자유주의 정당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신분적 제약의 철폐와 정치적 자유, 자결의 확대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의 선악을 단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보수에도 악과 선이 혼재되어 있고, 진보에도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보수는 선이고 진보는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유주의와 진보 전부를 ‘종북세력’이라고 몰아댑니다.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주의 전부를 ‘기득권 수구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바보 같은 사람들, 또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려는 영악한 사람들은 ‘양쪽 다 나쁘다. 둘 다 기대할 것 없다.’고 양비론을 퍼뜨리면서 현재 상태의 세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정치적 분쟁에 있어서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틀린지, 아니면 둘 다 옳고 둘 다 틀린지, 선악이 불명하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2.1.4. 집단주의/애국주의를 둘러싼 분쟁
집단과 집단 간의 분쟁은 집단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로 진화 또는 악화되어 전개됩니다. 집단주의적 분쟁의 기초는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지배권 내지 자결권입니다. 이웃 부족과 이웃 지방과 이웃 나라 간에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싸움이 전쟁으로 벌어집니다.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치적 군사적 지배권을 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약탈이 벌어지고, 그 이후에는 집단과 집단 간 민족과 민족 간 국가와 국가 간에 원한관계와 복수의식이 형성됩니다. 원한과 복수의식은 때로는 분쟁의 경제적 기초와 무관하게 움직이고 또 교묘하게 경제적 이익과 다시 결합됩니다.
공격받고 억압받는 자의 집단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자결권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묶인 자를 풀어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만, 공격하고 억압하는 자의 집단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주의는 인간의 개별적인 악을 집합시켜 더 폭력적이고 더 잔인한 인명 살상과 경제적 수탈을 야기합니다. 한 개인이나 한 정파로는 죄책감을 가지고 비난을 받으면서 하기가 곤란한 일들이, 집단주의와 애국주의의 이름으로는 아무 죄책감 없이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이루어집니다. 2차대전의 대량살상을 야기한 일본의 군국주의,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모두 이 종류의 폭력적 분쟁입니다. 경제적 이익을 기초로 한 분쟁 정치적/신분적 자유와 자결권을 둘러싼 분쟁들이 더 직선적이고 뚜렷하고 솔직하고 합리적이라면, 집단주의와 애국주의로 포장된 분쟁들은 어~ 하는 순간 사람들의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손발과 팔다리를 모두 묶어버리는 악으로 전락합니다.
‘원한(怨恨)’과 ‘복수(復讐)’라는 감정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이라는 합리적 이성을 덮어쓰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익’은 싸움의 원인인데, 싸움의 결과가 만들어내는 ‘원한’은 그 다음 싸움의 원인이 됩니다. 결과가 원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경험과 감정은 이성과 논쟁을 막아버립니다. 민족주의, 집단주의, 애국주의와 결합된 경험과 감정은 어리석지만 강력한 한 시대 한 민족의 우상(偶像)이 됩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종교인들이 하나님보다 이 우상을 더 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어서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에 지배를 받아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세상의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잘 보고 계실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방어적으로는 태평양전쟁을 공격적으로는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는, 방어적인 태평양전쟁에서 원자폭탄을 투하 받은 이후로 ‘피폭 국민’이 된 자기들의 원한과 피해의식만을 주장하고 자기들의 공격을 받은 아시아 민족과 국민들의 자신들에 대한 ‘원한’을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 세대에서 이 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그 사람들은 다음 세대를 역사적 백치로 만들어 버려서 이제 그들은 왜 욕먹는지를 모르고 왜 욕하느냐고 화를 내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 한 민족을 통째로 바보로 만들어 버린 이 역사적 비극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한 나라 한 민족 내 지역 간의 지역갈등으로 인한 분쟁도 있습니다. 지역갈등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호남과 영남 간의 괴로운 지역주의로 나타났다가 두 번의 정권교체 이후 어느 정도 완화된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경제적 차별이라는 ‘경제적 이익’ 분쟁과 ‘정치적 차별과 억압’이라는 ‘정치적 자유/자결’ 분쟁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호남의 경제적 약세는 여전해 보이지만 두 번의 민주당 집권을 통해서 광주민중항쟁으로 극대화되었던 정치적 자유/자결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 해소된 면이 있습니다.
2.1.5. 종교/이념을 둘러싼 분쟁
정치사회적 분쟁에는, 또한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인한 분쟁’과 ‘이념적 차이로 인한 분쟁’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종교적 분쟁은 과거 유럽에서 구교와 신교 간에 엄청나게 벌어진 적이 있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에도 십자군전쟁, 9.11.사태 이후의 전세계적 대립으로 이어지며,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오래된 반셈주의(Anti-Semitism)은 마침내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인간 악행의 정점을 이루고 이제 멈칫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분쟁이 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분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종교적 분쟁은 여러 경우에 그 아래에 은폐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지배권을 이유로 깔고 있습니다. 유럽의 신교국과 구교국 간의 분쟁, 카톨릭으로부터 영국 성공회의 분리 등은 표면에 있는 종교적 명분 뿐 아니라, 기독교세계(Christendom)을 이루는 국가와 영주들 간의 정치적 경제적 분쟁이라는 현실정치(real politics)를 그 현실적 기반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념적 분쟁의 가장 극렬한 모습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되어 20세기 후반 소련 몰락으로 끝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는 계급과 계급 간 싸움을 직접적인 목표로 내걸고 상대 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분쟁의 폭력성을 극대화한 비극이 있습니다. 경제적 이익을 가장 강한 기초로 하는 분쟁이고 정치적 지배권과 권력을 놓고 싸우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계급/계층 간 원한(怨恨)과 두려움, 집단과 민족 간 공포(恐怖)와 원한을 야기시켜, 집단주의의 변형인 애국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를 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야당을 지지하는 국민의 절반을 ‘종북’이라고 하면서 멸절시키려는 극우적 주장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2.2. 싸움의 형태
2.2.1. 폭력(暴力)과 살상(殺傷)
인류 역사의 수천 년 동안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과 정치적/신분적 자유/자결을 둘러싼 싸움이 나타나는 형태(形態)는 전쟁과 반란. 폭력적 억압과 생명의 파괴였습니다.
처음에 카인이 아벨을 죽였고, 카인의 후예인 라멕이 또 여러 명을 죽였고, 바로가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죽였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헤롯과 로마 황제들이 사도와 제자들을 죽였습니다.
신분제 하에서 노예나 농노가 도망치거나 자기의 운명에 거역하면 가두고 때리고 목숨을 취했습니다.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사람들은 피지배자인 조선사람들의 재산을 교묘하게 빼앗고 조선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잡아서 가두고 고문하고 사형시켰습니다. 독재자들은 권력에 항거하는 김주열 학생을 죽이고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박종철 학생을 죽이고 광주에서는 계엄령과 쿠데타에 반대하는 수백 명의 시민을 죽였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은 수백 년 동안 사람이 아닌 동물 취급을 받았고,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백인우월주의자(KKK)들로부터 린치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들도 1980년대의 5공 독재 하에서 ‘하고 싶은 말을 감시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날들, 조금이라도 소리 내어 ‘자유(自由)’를 외치는 것은 즉시 체포와 구금과 고문과 폭행을 의미하는 억압의 날들을, 떨면서 항거하거나 억눌려 모욕을 참으면서 겪어낸 적이 있습니다.
정치적 폭력과 인명의 살상은 경제적 약탈(掠奪)로도 이어집니다. ‘땅과 재물’을 빼앗기 위하여, ‘땅과 재물’이 누구의 것이냐 하는 싸움은 경제적 폭력과 인명 살상을 야기합니다. 정복한 나라와 민족은 정복당한 나라와 민족의 땅과 재물과 노동을 약탈합니다. 사회의 신분제와 소유권제도는 경제적 자유와 권리를 규제합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되기 이전에는 소수에게만 경제적 자유가 인정되어서 이를 둘러싼 소요와 진압이 계속 되었습니다.
2.2.2. 선거와 경쟁
1776년 미국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왕정/귀족정이 아닌 국민들의 주권에 입각한 선거제 민주주의가 전세계에 확대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 한계가 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민주주의가 어떤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극히 최근 2백년간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출현과 발전’은 획기적(劃期的)인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인간들 스스로가 권력을 독점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해 오던 수천 년의 묶임을 획기적으로 뚫어버린 것은 하나님 나라의 견지에서도 커다란 전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서 58장 6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전면적 확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안정화될 때까지는 여전히 쿠데타로 권력을 잡는 독재체제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살상과 희생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일단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쿠데타를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화되면, 정치적 분쟁의 폭력적 인명살상적 성격은 크게 완화됩니다. 왕정이나 독재체제에서는 권력이 독점되어 정치적 분쟁에서 ‘법’은 장신구처럼 무시되기 일쑤이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면 정치적 분쟁에서 ‘적법절차’를 무시한 폭력의 집행이 어려워지고, 선거를 무시한 폭력과 살상에 의한 권력의 장악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선거제 민주주의에서는 수없이 지루하고 짜증나고 끝이 없는 정치적 말싸움이 이어지지만, 말싸움은 주먹싸움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나라처럼 30여년의 독재체제를 거쳐서 가까스로 선거제 민주주의제도와 정권교체경험을 확보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변화시킨 정치적 분쟁의 ‘평화적 양상’은 세상적 견지에서나 신앙적 견지에서나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은 선거제 민주주의 하에서도 복지분배를 둘러싼 입법 싸움과 노사분쟁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가정적 개별적인 차원에서 자녀교육이라는 경쟁에 엄청난 에너지가 집중되어 진행되기도 합니다. ‘경쟁’의 본질적 악성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과 답답한 일들이 나타나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현재의 교육 전쟁은 과거 사람을 서로 죽이고 죽던 경제적 계급투쟁이 평화적으로 전개되는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사멸해 버린 셈이지만, 맑스레닌주의적 공산주의는 선거제 민주주의와 비교해 본다면 ‘노동계급에 의한 귀족정(貴族政)’ 내지 ‘공산당이라는 철인(哲人) 집단에 의한 왕정(王政)’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신분적 자유와 자결’의 진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프랑스대혁명의 진보적 부분을 가장 극단적으로 추구한 것처럼 보이는 공산주의가,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분쟁해결방법의 평화적 진전에 있어서는 오히려 퇴행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2.2.3. 세종대왕과 추노(推奴) / 시저와 스파르타쿠스
도망하여 쫓겨 다니는 추노(推奴)의 입장에서 볼 때 신분제의 조선시대는 인간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고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악(惡)’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시대의 왕 중에도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은 우리가 훌륭한 왕, 좋은 왕이라고 칭송합니다. 세종대왕 때에도 추노는 잡아서 그 생명과 신체와 정신을 압박했을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노예들에게는 로마공화국이든 로마제국이든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억압하는 악입니다. 그런데 그 로마는 나름대로 아직까지 그 위명이 살아있는 시저와 같은 상층부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적 제도와 법과 문화와 철학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쓰던 18세기 19세기의 미국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1776년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으로 세계 최초의 대규모 공화국을 건설한 미국은 나름대로 위대한 민주주의의 전통을 인류에게 선물했습니다. 정치적/신분적 억압과 폭력의 악 속에 또 세상은 이리저리 굴러가고 발전도 했던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우선 신분제 사회에서 비자유 신분이 아닌 자유신분(귀족 또는 시민) 내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고 사회의 운영 내지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당혹케 하는 로마서 13장, 즉 노예제 로마의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는 내용은 이런 맥락에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하나는 신분제 사회나 비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도 그 사회체제의 틀 안에서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고 순종을 하고 현재 상태(status quo)를 건드리지 않는 경우에는 그냥 그 제약 안에서 살다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더라도, 신분제/왕정/독재 사회에서 정치경제적 분쟁을 처리하는 폭력성은 여전히 간과할 수 없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도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귀족이나 왕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신분의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는 사람은 극형에 처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적어도 이런 꼴을 당하기 않게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 자신에게도 감사합니다.
2.3. 싸움의 구분 (당파적 싸움과 비당파적 싸움)
2.3.1. 당파적 분쟁과 비당파적 분쟁/ 당파적 공익과 비당파적 공익
앞에서 세상 속 싸움의 원인과 형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속 싸움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옳은 자와 그른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지지하여야 할 선(善)과 배척하여야 할 악(惡)의 구분이 항상 뚜렷하게 나타난다면, 문제는 매우 쉬워집니다. 그 싸움을 할 용기의 유무가 문제이지 방향은 분명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싸움이 그리 당연하고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진보에게는 보수가 악당이지만 보수에게는 진보가 위험분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이기심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자는 자기가 세상의 부를 창출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둘이 싸우고,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사악하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믿는 사람도 보통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사회적 논쟁과 분쟁이 벌어질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의 경계는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세상 속 싸움의 성격을 한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본항에서는 앞에서 본 경제적 이익 관련 분쟁, 정치적 분쟁, 집단주의적 분쟁, 종교적/이념적 분쟁 중 ‘경제적 이익에 관한 분쟁과 정치적 분쟁’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데, ‘당파적 싸움’과 ‘비당파적 싸움’이라는 개념을 활용합니다. 그리고 정치사회적 분쟁이 추구하는 공공선과 공익(public interest)의 성격에 대해서도 ‘당파적 공익’과 ‘비당파적 공익’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분석을 전개합니다.
2.3.1. 당파적 싸움 (Partisan conflict) / 당파적 공익(公益)
상식적인 말들의 상당수는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은 생각은 많은 것을 망칩니다. ‘당파 싸움은 나쁘다’는 상식, ‘국론분열은 나쁘다’는 구호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평등하고 균등하고 균질하다면 당파도 필요 없고, 분열도 필요 없고 싸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동등하지 않고 평등하지 않고 균질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다른 이해관계가 존재합니다. 그 다른 이해관계만큼 당파가 있고 정파가 있고 다른 정치적 어젠다(agenda)가 있고, 당파적인 논쟁과 분쟁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병이 있고 아픈데, 병이 없다 아프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거나 거짓말입니다. 아픈 사람보고 병이 있다는 얘기도 하지 말고 아프다고 신음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억압이고 만행입니다. 세상에는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에 대한 울분을 얘기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부자는 자신이 이룩한 부를 변호하거나 경제를 굴려가는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선거를 통해서 각 진영, 각 당파가 자기주장을 돌아가면서 실현시킬 기회를 부여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비효율성이 가진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장’과 ‘복지’는 서로 대립하고 모순되는 것 같지만, 복지가 있어야 성장이 의미가 있고 성장이 있어야 복지가 가능한 상호불가분성도 존재합니다. 미국의 정치속담인지 뭔가에 ‘공화당원(Republican)은 머리(head)는 있지만 가슴(heart)이 없고, 민주당원(Democrat)은 가슴(heart)은 있지만 머리(head)가 없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본질을 단순하게 보여주는 직관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려면 가슴과 심장이 다 있어야 하듯이, 세상이 굴러가려면 진보의 개혁성(heart)과 보수의 합리성(head)가 다 존재하고 싸우며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한 집단, 한 정당이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를 다 합쳐서 사람 세계에 가장 유리하고 합리적이고 좋은 것을 제시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아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위험합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고 욕망이 절규를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자기의 주장을 하고 상대방을 욕하고 다투게 하는 것이 더 건강하고 더 안전합니다. 당파를 없애려고 한 시도는 모두 악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민총화를 내걸은 유신체제와 정의사회 선진조국을 모토로 내건 5공화국을 보십시오, 다른 의견에 재갈을 물린 국민총화는 뻥이고, 국민의 선거권을 빼앗아서 만드는 정의사회 선진조국은 거대한 감옥이 되었습니다. 국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사회주의적 이익을 통일시켰다는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일명 나치당)은 민족의 이름으로 독일 민족 전부를 죄악에 빠뜨리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집단적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고, 부자 계급을 없애서 ‘평등하고 동등한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소련 공산주의의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당파싸움이 악한 것보다 당파싸움을 없애려는 생각이 더 악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극우파의 ‘종북세력’ 주장이 악한 것은 국민의 절반이 가지는 생각을 묶고 그 입을 막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들 전부를 없애고 싶어 하는 ‘독(毒)’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논쟁 속에서 나타나는 말도 안 되는 주장과 추한 행동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짜증나게 하더라도, 민주주의 정치제도 하에서 내 생각과 반대되는 나쁜 놈들과 나쁜 생각과 어이없는 주장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당파적 의견과 다른 반대의 당파적 의견과 행동이 없는 세상은 아예 꿈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50 대 50의 당파적 주장 내지 40 대 60의 당파적 견해는 각각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현실적 이익과 합리적 전망을 가진 「당파적 공익(黨派的 公益)」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서로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축구경기에서 각각의 팀에게 승패는 50 대 50의 당파적 이익을 가집니다. 그러나 축구 경기의 규칙(rule)을 지키는 것은 양 팀 모두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100의 비당파적 공익을 가지는 것이고, 한 팀의 1회적 승리라는 당파적 이익을 위해서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더 큰 공익이 됩니다.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공정성 유지, 적법절차(Rule of Law)의 확립 등은 당파적 공익 간의 싸움이 가능하게 하는 더 큰 공익으로, 이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1회적 승리를 위한 당파적 공익을 발동시키는 것보다 사회와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한 비당파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민변이나 참여연대의 활동을 보면, 비당파적 공익과 당파적 공익의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존재합니다. 민주주의, 인권, 사상표현의 자유에 관한 주장과 활동에는 비당파적 싸움, 비당파적 공익의 측면이 강합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위한 대기업과의 싸움, 복지분배의 확대를 위한 부유층과의 논쟁에는 ‘당파적 공익’의 측면이 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파적’이라고 해서 ‘사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공익’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적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사익’이 아니고 그 계층의 ‘공익’입니다.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노동조합의 주장과 노동쟁의를 ‘사익’으로 취급하고 배척하고 가능하면 금지시키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노동삼권은 대한민국 헌법 제33조가 인정하고 있는 헌법적 당파적 ‘공익(公益)’입니다. 이것은 성장과 효율성을 주장하는 보수 쪽의 ‘당파적 공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운동 내지 진보 측에서 보면 성장과 효율을 주장하는 보수의 어젠다는 진보의 이해관계에 맞지도 않고 기득권의 벌거벗은 이익(naked interest) 추구로 보이고 대립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경제적 권력의 압박과 폭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반대되는 대립되는 ‘당파적 이익’은 싸워서 이기거나 제약시켜야 하는 대상이지, 없애고 박멸시킬 대상은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이 인식이 없이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갈라져 있고 나뉘어져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리하실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는 ‘당파적 싸움’과 ‘당파적 공익’이 매우 중요합니다. 양 진영 또는 몇 진영은 당파적 이익을 서로 외치고 주장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열심히 주장하고 변론하고 관철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입이 막힌 상태로 벙어리 귀머거리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당파적 이익은 그 당파에 해당하는 사람의 무게만큼의 ‘공익’성을 가지므로 그 무게만큼 서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당파적 주장을 멸시하고 배척하고 금지하려는 극단적 ‘당파적 생각’은 잘못되고 악한 것입니다.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다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사람을 죽이려는 살의(殺意)’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양비론의 무책임성이나 양시론의 무기력증을 쫓자는 것은 아닙니다. ‘당파적 싸움’과 ‘당파적 공익’이 서로 대립하고 통합되는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세상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유익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여기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놓인 자리와 또는 자기의 주견과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자기의 주장을 떳떳하고 투철하게 주장할 자유와 권리와 의무와 사명감을 가집니다. 내 주장이 100퍼센트 옳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반영하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에 당파적 공익의 거대한 자유가 있습니다.
2.3.2. 비당파적 싸움/ 비당파적 공익
‘당파적 싸움’, ‘당파적 공익’은 대체로 경제적 이익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사람의 인생이 오직 경제적 이익과 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싸움과 다른 성격의 공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익법률사무소 공감이나 어필(APIL) 등에서 진행하고 있는 난민,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장애우, 다문화 가족을 위한 공익법률활동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 활동’은, 노동조합과 사용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처럼 50대 50의 대립구조를 가지는 당파적 공익이 아니라 70 내지 80의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비당파적 싸움, 비당파적 공익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당파적 공익이 ‘싸우는 공익’이라면 비당파적 공익은 ‘안 싸우는 공익, 착한 공익’이라는 성격을 가집니다.
독재정권 하에서는 인간의 시민의 보편적 자유와 존엄성을 위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보라고 하는 ‘싸우는 공익’이 ‘비당파적 공익’으로서의 보편적 공익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형식상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선거제 민주주의제도가 운영되면 서서히 ‘싸우는 공익’이 ‘당파적 공익’적 성격으로 진화되어 가고 ‘안 싸우는 공익’이 비당파적 공익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당파적 공익’이 주로 ‘소수자(minority) 보호활동’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비당파적 공익에는 ‘소수자 보호’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다수자(majority)의 보편적 공익 보호’도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복지제도, 교육제도, 사회제도, 가치관과 문화현상으로 인해서 오는 결박의 해결’ 등 정치적 당파적 분쟁이 다 커버할 수 없고 소수자 보호의 비당파적 공익운동으로 해결될 수 없는 커다란 영역이 존재합니다. ‘소수자 보호의 비당파적 공익’은 ‘착한 일’의 성격이 좀 더 강하고 따라서 우리 중에 좀 더 착한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하다면, ‘다수자의 이익을 위한 비당파적 공익’은 ‘선악 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악간의 행동양식’을 다루는 것이어서 ‘선악 간에 살아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비투신적 생활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장 세상의 권세가 강하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경쟁 드라이브’속에서 모든 사람의 인생과 생활을 지배하는 바로 이 영역이어서, 이 싸움은 가장 어렵고 힘들고 극복하기 어렵고 싸움을 시작하기조차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 ‘다수자를 위한 비당파적 공익을 위한 싸움’에는 좀 더 깊고 강력한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4. 목표 : 싸움은 끝날 수 있는가
2.4.1.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싸움은 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싸움은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합니다. 싸움이 없으면 사람들이 고통을 덜 받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목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희망적 질문이 제기됩니다. “싸움은 끝날 수 있는가?”
그러나 앞에서 쭉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이 세상에서는 빈부차이가 없어지지를 않을 것이고, 이와 연결되거나 독립된 정치적인 의견의 차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및 정치적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낯이 붉어진 카인에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선한 일로 죄를 다스리라’는 권고를 사람들은 듣고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싸움을 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죄인이고, 믿는 사람들도 죄인입니다.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가령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일에 교회를 나간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들도 완전히 죄성을 벗어난 것이 아니므로, 세상의 싸움과 폭력과 그로 인한 슬픔과 원한은 그치지를 않을 것입니다.
병을 잘못 진단하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세상에 싸움이 그칠 수 있다는 생각, 세상에 싸움을 그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위험합니다. 세상에 싸움이 그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착각은 억지로 세상에 대한 눈과 귀를 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는 어리석음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싸움을 그치게 할 수 있다는 실천론적인 착각은 결국 인위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을 막고 감옥에 가두고 세상에서 자유를 사라지게 하려는 ‘최악의 싸움’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2.4.2. 싸움은 그치지 말아야 한다.
싸움을 안 하는 것이 좋다. 이 생각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당파적 싸움도 해야 하고 비당파적 싸움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기 위한 싸움을 계속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시험 속에서 살고 범람하는 악의 세상 속에서 악을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시민적인 입장에서도 이 세상의 자유와 평화와 복지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여야 하고, 나를 위한 나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위한 싸움도 계속하여야 하고, 이웃을 위한 싸움도 계속 벌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의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불의와 이 세상의 원리적이고 심층적인 불의, 즉 인간을 모두 물신주의적 경쟁의 세계로 몰아넣어 경쟁과 욕망의 종으로 살게 하는 이 세상의 종이 되어 묶인 인생을 살다가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세상 분쟁 속의 하나님 – 하나님은 어디에?
3.1. 귀 먹은 하나님?
과거 1970년대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 중에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잘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 먹은 하나님’이라는 가사를 가진 노래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부정의와 부자유와 억압과 폭력이 자행되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냐는 진지한 항변입니다.
여러 가지 고민과 논쟁거리들이 있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세상 분쟁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살상과 잔인함은 하나님의 죄가 아니라 사람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에 카인이 아벨을 죽이려고 낯이 붉어졌을 때에도 그 옆에서 친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이 너에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라고 아주 절실하게 호소를 하였지만, 카인은 이 말씀을 듣지 않고 들에 있을 때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이 죄와 이 책임은 카인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카인 이후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종교적 인정 포함]을 위해 싸울 때, 일단은 폭력과 살인, 적대자 내지 경쟁자의 제거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살상이 벌어지고, 지배권을 뺏거나 위탁받은 자가 왕이 되어 신민의 자유를 빼앗고 싸움에 진 부족이나 민족을 노예(종)으로 삼고 하는 모든 폭력과 살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만행들도 사람들이 범한 것이지, 하나님이 시킨 일이 아닙니다.
3.2. 하나님의 명령 - 살인하지 말라! (제6계명)
인간의 세계에 범람한 폭력과 살상과 약탈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헌법인 십계명 중 제6계명을 통해 강력한 금지령을 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3). 그리고 이어지는 구체적인 율법/법률(Law)을 통하여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Any one who strikes a man and kills him shall surely be put to death.)”라는 명백한 처벌법규를 계시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1:12).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찌니라(You shall not steal)!” 또한 타인의 땅과 재물과 노동에 대한 폭력적 약탈을 금하는 하나님의 엄한 명령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으로도 성문화되어 대부분의 법에서는 살인죄를 사형 내지 중한 신체형으로 처벌합니다. 인간의 정치경제적 분쟁에서 폭력과 살상을 범한 자가 세상의 법에 저촉이 되거나 세상의 법정에 의하여 기소되고 처벌을 받으면 일단 이 하나님의 법이 집행됩니다.
그러나 만일 왕정/신분제도/독재체제에 의하여 살인과 폭력이 (i) 성문법상으로도 죄가 안 되거나 (ii) 성문법 상 죄가 되어도 권력의 힘에 눌린 불의한 법정에 의해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인가? 그냥 무기력하게 구경만 하시고 말없이 돌아서실 것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편 121:4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였고, 이사야서 이사야 55:11에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으며,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18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법에 의한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벌어지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저지른 불의한 폭력과 살상행위 중 인간의 불의한 권력과 불의한 법정에 의해서 처리되지 못한 것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떻게든 처리가 될 것이고, 하나님이 무기력하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3.3. 예수님의 자유 선포 - 눌린 자들을 자유(自由)케 하라
이사야서 58장 6절 내지 12절(공동번역)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6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7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8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 9 그제야 네가 부르짖으면, 야훼가 대답해 주리라. 살려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주마.' 하리라. 너희 가운데서 멍에를 치운다면, 삿대질을 그만두고 못된 말을 거둔다면, 10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준다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오리라. 11 야훼가 너를 줄곧 인도하고 메마른 곳에서도 배불리며 뼈 마디마디에 힘을 주리라. 너는 물이 항상 흐르는 동산이요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줄기, 12 너의 아들들은 허물어진 옛 터전을 재건하고 오래오래 버려두었던 옛 터를 다시 세우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수축하는 자' '허물어진 집들을 수리하는 자'라고 불리리라.』 같은 맥락에서 시편 146:7등 많은 구절은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야훼는, 묶인 자들을 풀어주신다.”고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노래합니다.
예수께서도 첫 번째 회당 설교(누가복음 3:18-19)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自由)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自由)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여 온 세상에 자유(自由)를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自由)’가 현세적인 자유를 의미하는가, 영적인 자유를 의미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배우고 가르쳐 온 일이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자유가 현세적 자유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영적인 자유,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성령과 영생의 자유, ‘진리(예수님)을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문제는 “이 자유 속에 세상의 현세적인 자유는 포함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에 현세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일단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문리해석상으로도 뚜렷한 근거 없이 이루어지는 제한해석 및 축소해석으로 보인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실천적인 면에서 이러한 제한축소해석은 현실적으로 부당한 구속과 제약에 눌린 사람에게 ‘계속 비자유하게 살 것을 강요’하고,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현세를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해석은, 하나님이 마리아의 기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1:51-53)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는 말씀과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 2:3-8)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는 말씀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자유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누리는 현세적 자유의 관계입니다. 현세적 자유를 너무 강조하면 영적인 자유가 의미 없어 보이고 인본주의와 기독교 신앙에 차이가 없어지는 문제가 있고, 영적인 자유만을 강조하면 세상에 대해서 무기력 무능력하고 세상의 악에 동조하는 기독교를 만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자유’에 사람의 현세적 자유가 포함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3.4. 왜 빨리 고쳐주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악행과 폭행과 살상행위가 분쟁 과정에서 계속 범해지는 것을 직접 금지하거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사회제도를 고쳐주시지 않았을까?’ ‘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살다가 죽도록 노예제도를 방치하시고 약 200년 전 까지는 민주주의 제도조차 인간이 누리지 못하도록 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같은 고통 속에 방치하시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책임의 원칙’에 따라 사람이 지은 잘못은 원칙적으로 사람이 책임을 지고 고쳐야 하지,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고쳐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는 우리 사람들을 원망할 일이지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금지명령과 함께 “너희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너희 동족에게 앙심을 품지 말며 너희 이웃을 너희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다(레위기 19:18)”라는 말씀 등을 통해서 우리가 폭력적이고 잔인한 정치사회적 분쟁을 벗어나는 길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직접 세상의 악한 권력들을 물리치시고 신분제도를 철폐해서 종들을 해방시키시지, 그러지 않고 그냥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해서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라는 질문도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지만, 아마도 예수님의 미션은 정치사회적 권력의 폭력성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인이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으심으로써 ‘세상의 권력과 그 폭력과 그 부당성’을 여실하게 폭로하시고, 십자가 나무가 인간의 모든 죄와 오만과 폭력에 대한 ‘Stop’ 사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뒤로 2천년동안 수많은 왕과 정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권력을 잡았다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먹었지만, ‘권력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사람’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왕들의 주장 자체가 ‘왕과 그들이 주장하는 세상 권력’에 대한 통렬한 야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아모스 3:7의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는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번거로우시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들에게 계시하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인바,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불의와 폭력을 없애고 고치는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로 적용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 계시를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2천년동안 노력해 온 하나님의 일, 그리고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따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압제와 폭력으로부터 사람들의 정치적/신분적 자유와 자결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과 이틀 정도밖에 안 되는(베드로후서 3:8) 최근에 들어와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 날이 올 것이고, 그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이 세상에는 수많은 눈물과 폭력과 살상과 싸움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 우리를 악에 빠지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시험과 악에 끌려가고 순종하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루 종일 입으로 기도만 할 것인가? 할 수 있는 대로 현명하게 지혜롭게 세상의 시험과 악에 저항하고 세상을 이길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현세적 자유를 위한 싸움은 필요하지만, ‘싸움’ 그 자체를 위해서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얽매게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종’에서 ‘싸움의 종’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역설적이지만 인간은 항상 이 일을 반복합니다. 싸우지 않고 ‘세상의 종’으로 그냥 살 것인가, 아니다! 하고 선포하고 싸움을 하는데 어~하다 보니 자유가 없어지고 ‘싸움의 종’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우리가 싸움의 종이 되는 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곧바로 ‘자유’를 얻습니다. 현세에서 지배자의 자리에 있거나 노예의 자리에 있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에 힘과 에너지를 주시어, 자동적(自動的)으로 우리가 자유를 위한 싸움에 나서게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먼저 내가 당하는 부당한 억압에 저항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령의 사람은 세상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시험을 이길 힘이 있습니다. 바보 같이 비굴하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지 않을 힘과 지혜와 용기를 줍니다. 직장 생활을 해도 직장에 지지 않고, 세상의 시민적 삶에서도 불의에 굴종하지 않고 싸울 의분과 기개와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고도, 세상의 명예욕을 쫓고 세상의 권력에 기죽어 비굴하게 아부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성령으로 받은 권세로 자유롭게, 세상의 모든 구속과 맞서 싸우고 자유롭게 살고 자유를 위해 싸우고 세상을 거꾸로 눌러 이기는 ‘자유’로운 삶을 성령의 사람은 추구합니다. 우리가 ‘럴럴럴’하고 방언하는 것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다’가 아닙니다. 성령은 방언과 예언을 통하여 우리가 언어로부터의 자유를 얻게도 하시지만, 성령은 우리의 세상에 대한 입을 열어 세상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발언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어, 세상이 우리를 밀어붙이는 욕망의 드라이브로부터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십니다.
성령은 세상이 우리를 묶는 구조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및 모든 억압에 대해서 분노하시며, 성령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그 모든 억압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싸우게 하십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슬퍼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그 눈물을 닦고 세상과 맞서 이기게도 하시며, 다른 사람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함께 슬퍼하고 그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과 세상에 분노하고 규탄하며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이웃사랑의 행동에 우리가 나서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없이 우리 자신의 영과 능력으로만 하면 힘이 들고 시험에 들고 또 다른 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과 나의 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힘에 모든 것을 맡기면, 내 속에 있는 성령이 슬퍼하시고 내 속에 있는 성령이 분개하시고 내 속에 있는 성령이 나의 눈이 움직이게 하게 하시고 나의 귀가 듣게 하시고 나의 마음이 움직이게 하시고 나의 몸과 영혼이 움직이게 하시고, 나의 손이 일을 하고, 나의 발이 걸어가게 하셔서,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유롭게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자유를 위해 세상과 싸우는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이 제약되고 성령이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면 먹고사는 문제와 명예욕과 세상 자랑 때문에 자유를 잃고 타인의 자유를 뺏고 세상의 억압에 굴복하고 나아가 아부까지 합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세상의 축복을 남발하지 맙시다! 십자가에서 벌거벗고 돌아가신 예수님께 나의 세상적 욕망을 충족시켜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만행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세상의 영광과 권력을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사람들 대신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실 수도 없고 그러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애가 힘들여 공부하는 모양이 불쌍하다고 해서 부모가 대신 수학 문제를 풀어주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면 애는 전혀 문제 풀 능력이 없어지고 진짜 시험은 망치고 그 성적도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 없이 세상의 제도가 좋아지면, 우리의 악성은 곧바로 그 제도를 나쁘게 만드는 귀신같은 재주를 부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를 푸는 것을 놓아두실 수밖에 없고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성령을 가지고 이 세상의 시험을 이기고 이 세상의 악을 이기는 싸움, 나를 자유케 하고 이웃을 자유케 하고 세상을 자유케 하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것을 창고에 처박아두고 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힘을 얻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힘을 의심하는데 인생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과 사람들을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묶인 데서 풀어주는 자유의 싸움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지, 방언과 예언의 은사로 황홀해지기만 하고 영적 자랑을 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 신비체험과 영적 자부심은, 내 몸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움직임으로 나가야 합니다.
찬송가 410절,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사랑하여 주는지 난 알 수가 없구나,’라는 노래는 질문만 하고 답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쓸데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나도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나설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능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나 혼자 먹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내게 은혜를 주시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도 답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혼자 먹고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4.2.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智慧) – 성악설적 전복의 개혁주의
나 개인은 내 인생 하나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싸우고 세상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러니 내 인생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세상을 위해 싸우려 나설 때에는 자기의 선의(善意) 뿐만 아니라 ‘명예’와 ‘권력’과 ‘자랑’ 등 우리 입맛에 맞는 다른 ‘욕망’의 요소들이 양념으로 첨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한 것 속에 악한 것이 섞여있고, 악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떤 것도 완전히 깨끗하고 선할 수가 없습니다.
우아한 명예와 자랑 같은 것도 인간의 욕망과 이해관계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결합되면 당초의 ‘선한 의도’는 왜곡되고 비틀어지고 꼬이고 뒤틀려집니다. 그래서 선한 의도에서도 악한 결과가 나옵니다. 자기의 의지로 선한 일을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지쳐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가 지쳐 떨어진 사람은 선한 일 자체를 싫어하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되면, 성령충만해지면 선한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안 믿는 사람도 죄인이고 믿는 사람도 죄인이고, 안 믿는 사람도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지만, 믿는 사람도 자기 인생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고, 안 믿는 사람도 다른 사람 신경 쓰기 힘들지만 믿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 신경 쓰며 사는 것은 힘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닌 것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잘 압니다.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서는 쉽게 성악설(性惡說)적인 태도와 인간을 불신하고 의심하는 관점을 가지면서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성선설적인 태도와 인간을 신뢰하고 의심하지 않는 관점을 가집니다. 여기에서 많은 비틀거림과 헷갈림과 실수와 실수하고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잘못과 착각과 어지러움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안 믿는 과거의 나도 악했지만 지금 믿는 현재의 나도 악합니다. 안 믿는 나는 죄인이었고 믿는 나도 죄인입니다. 안 믿을 때도 세상을 사랑하고 이익과 욕망을 추구했지만 믿는 지금도 세상을 사랑하고 이익과 욕망을 추구합니다. 안 믿을 때도 성질내고 미워하고 싸웠지만 믿어도 성질내고 미워하고 싸웁니다. 세상에서 너무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만 신앙으로 너무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믿는 신도도 죄인이고 믿는 집사도 죄인이고 믿는 장로님도 죄인이고 믿는 목사님도 죄인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우리가 행하려는 선한 일은 많은 악을 파생시키고 파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자유와 함께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은 사람이 모두 죄인이라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인간을 결박하는지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과 어떻게 싸워서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가 세상이 주는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세상을 시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사람은 선하다’고 생각한 (인본주의적) 성선설적인 개혁주의는 인본주의의 최절정에 해당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그 한계와 실패가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대중도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지도자도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선설적인 개혁주의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악하지만 믿는 사람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신본주의적) 성선설적 개혁주의 또한 성공하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의 선의와 착한 의지는 아름다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충만해져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해 질수록 위험해 지고 성령충만해 질수록 악의 저항과 공격도 강력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어떻게 헤매고 무너질지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랑’이 ‘인간의 자랑’으로 넘어가는 것은 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은 악하고, 안 믿는 사람도 악하고, 믿는 사람도 악하다’는 성악설적인 전복의 개혁주의가 정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악설적인 전복의 개혁주의는 인간의 선의와 거룩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의지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성령이 주시는 정교한 지혜로, 세상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한탄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인정하면서, 너무 빨리 달려서 다리가 부러지지도 않고, 너무 천천히 움직이거나 자리에 주저앉아서 욕창이 나지도 없으며, 목적과 목표를 우상으로 만들지도 않고, 싸움이 주는 명예와 자랑의 노예가 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도 않고, 나와 우리들을 지나치게 과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와 우리들은 과소평가하지도 않으면서, 세상과 나와 우리를 직시하면서 단단한 한 걸음을 찾고 함께 ‘진리를 위한 자유를 위한’ 한 걸음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인간의 반역과 죄악으로 전개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싸움과 결박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와 싸움과 폭력과 미음과 원한에 결박된 우리의 운명을 한탄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의 의와 종교적인 의로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세상의 위로 올라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 아니며 세상의 아래로 내려가 세상을 전복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후,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세상과 싸울 힘을 주시고, 세상과 싸울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침울해 하거나 너무 성질을 내거나 너무 한탄하거나, 너무 억지를 부리거나, 너무 착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인생을 붙잡고 장악하시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인생과 행동과 실천과 나날을 움직이시기를 원하고, 나의 의지와 나의 자랑과 나의 꿈과 나의 의로움 이런 것을 모두 포기하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 속에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그냥 살아갑시다. 이러면 세상의 분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친히 세상의 분쟁을 섭리하시고 세상의 모든 결박을 푸시고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 이 글은 필자의 책 "욕하는 기독교, 욕먹는 기독교(대장간)" 8장에 수록된 글이며, 2014년 초에 작성된 글로 2022년 4월 현재의 상황에 다시 비추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