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2-13 14:32
[이상국 칼럼] 괴델 에셔 바하 정리 - 원인-결과 관계와 '지금'이라는 문제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34,267  


괴델 에셔 바하 정리 - 원인-결과 관계와 '지금'이라는 문제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 - 타무라 레이코, 이와아키 히토시 작 만화 '기생수' 중

이게 지금인가? - 돌로레스 애버내시, 미국 케이블 티비 방송국 HBO의 신작 드라마 '웨스트월드' 중

당연한 답은 '그렇다'이고 맞는 답은 '아니다'이다. - 리차드 뮬러가 지은 대중과학서적 '지금' 중


1.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친구와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친구의 등을 살짝 밀었는데 재수없게도 친구가 넘어져서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친구가 당한 사고의 원인은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친구가 입원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서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면 친구의 결혼의 원인도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친구를 밀지 않았다면 그 간호사를 만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친구의 결혼의 '주요 원인'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시작과 결론이 있는 이야기는 원인과 결과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친구를 밀어 친구가 넘어지고 친구가 넘어져서 병원에 가고 병원에 가서 간호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한다. 원인-결과 관계가 없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가 어렵고 공감도 잘 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피터 그린어웨이나 데이비드 린치와 같이 비논리적인 내러티브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야기를 할 때 주요 줄거리는 어느 정도의 원인-결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약간의 이탈적인 전개만 추가한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사람의 삶은 출생에서 시작해서 사망으로 끝을 맺지만 그 사람의 출생은 다른 사건들의 결과이고 그 사람의 사망은 다른 사건들에 대한 원인이 될 수 있다. 현재 시점의 모든 사건은 과거의 사건들의 결과이고 그 과거의 사건들 역시 그 이전 과거의 사건들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이야기에서도 내가 친구와 길을 가게 된 원인이 과거에 존재할 것이고 나한테 장난기가 발동한 원인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현재 시점의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과정이 한없이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인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원인이 여러 개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궁극적이라던가 근원이라던가 하는 말 자체가 어떤 특별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유일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근원을 '신'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빅뱅'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빅뱅도 신이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원인은 '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도 이런 생각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추상적인 논리의 궁극적 귀결로서 신을 상상했는데 어떤 사건 z가 이전 사건 y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났고 y가 x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났다면 이런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궁극적으로 a라는 근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확장해 기독교 신의 존재의 기반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사슬 속에서 파악하고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을 '신' 또는 그와 유사한 다른 존재에서 찾는다면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자리를 잡기 힘들어진다. 이전의 다른 원인이 없이 자신 만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신 밖에 없다면 내가 벌이는 모든 일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다른 원인들의 결과에 불과하고 나라는 주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체라는 말조차 스스로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주체라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리 전개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혼란이다. 여태까지 나는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제대로 정의된 개념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펼쳐왔다. 원인과 결과가 실제 존재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18세기에 이런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2.

앞의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보자. 앞에서 내가 친구를 밀었기 때문에 친구가 간호사와 결혼을 했고 내가 밀지 않았다면 간호사와 결혼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내가 친구를 민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친구를 밀었을 때부터 친구가 간호사와 결혼했을 때까지의 중간 과정은 친구가 결혼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건들로 가득하다. 친구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넘어졌어도 뼈가 부러지는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그 간호사가 다른 병원에 근무했거나 그날 친구를 담당하지 않았다면 친구는 간호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밀어서 친구가 넘어졌다는 말도 논리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밀었고 그 후에 친구가 넘어졌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밀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친구가 넘어졌다는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흄에 따르면 그런 말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밀었고 그 후에 친구가 넘어졌는데 다른 경우에도 어떤 사람이 밀면 다른 사람이 넘어지더라. 그래서 미는 것과 넘어지는 것은 뭔지 몰라도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 그런 관계를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인과관계라고 부르자'라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결국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어떤 정확한 개념이 아니라 반복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관습적인 인식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한낱 궤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철학자들이나 논리학자들이 거의 항상 맞부딪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넘겨버릴 수는 없는 문제이다. 오히려 이런 것이 궤변으로 느껴지는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가 얼마나 우리 의식 속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흄이 이런 의문을 제기한 이후 몇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반박이 나오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인간이 경험하는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물질 세계의 기본 계층인 입자들의 세계에서는 원인 결과라는 것이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되어버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미시적인 세계에서 모든 입자들은 힘의 방정식에 의해서 그 움직임이 결정된다. 아래와 같은 사진에서 보면 각 평면이 어떤 순간의 세계를 나타내고 하나의 평면의 상태는 그 이전 평면에 의해서 결정된다.

casualty1.jpg

 따라서 세상은 연속된 영화 필름처럼 이해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어떤 필름이 한 순간을 나타내고 그 필름의 모든 것은 결국 그 이전 필름에 의해서 결정된다. (물론 현실은 영화 필름처럼 24분의 1초 단위로 나뉘어 있지는 않다)

casualty2.jpg

그렇다면 하나의 필름은 그 이전 필름의 결과라고 볼 수 있고 이전 필름은 다음 필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물리적인 방정식에 의해서 결정되고 정해진 경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자유의지나 주체라는 개념도 의미가 없어진다.

3.

이렇게 미시적인 수준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다면 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그런 개념이 불명확해지는 것일까? 미시적인 수준이니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이이 어쩌고 하긴 하지만 결국 세상은 원자와 같은 기본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수준 또는 계층이 달라짐에 따라 그 계층의 세상의 동작 원리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다룬 바가 있지만 (참조 :http://aporia.co.kr/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153) 이 경우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 있어서의 사건이라 함은 미시적인 수준에서의 원자 운동 및 원자 결합 형태에 대한 개요인데 공간적, 시간적으로 어떤 범위까지를 요약해서 하나의 사건이라고 이야기할지는 인간의 인식 수준에서의 필요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미시 세계의 논리적 귀결로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친구를 밀 의도가 생겼다고 할 때 이 말은 미시적인 원자 레벨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선택적인 묘사이고, 그것이 어떤 범위를 선택한 것인지는 결국 사람 인지의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필연적인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미시 세계에서 아무리 명확한 개념이라고 해도 그 개념의 논리적 타당함이 상위 수준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사람이 인지하는 것과 관계없이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물리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는 애매한 개념이기는 해도 세상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원자 세계의 원인과 결과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어차피 주체나 자유의지와 같은 것이 의미 없는 개념이라는 것은 여전히 타당한 주장이 아닐까? 물리적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어떤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주장은 물리학에서는 일반적인 것인데 그린의 '우주의 구조'에서도 시공간을 식빵 덩어리로 보고 한 시점을 식빵 한조각으로 비유하고 있다. 결국 현재 미래 과거가 하나의 덩어리로 고정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과거와 미래의 구별도 모호한데 왜냐하면 물리학을 지배하는 4대 힘들이 극히 특수한 경우만 제외하고는 (방사선 붕괴와 관련된 힘인 약력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시간의 흐름 방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즉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서 영화 필름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움직임이 물리학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조각으로 부서진 컵이 원래의 온전한 컵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물리학 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이러한 방향성을 엔트로피의 증가 방향이라고 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우주의 시간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런 방향성은 빅뱅의 시점에서 우주의 엔트로피가 극히 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린이 우주의 구조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4.

그러나 과연 그럴까? 시간의 흐름을 엔트로피의 증가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불만족스러운 설명이다. 결국 가능성이 많은 상태를 향해 우주가 변화하고 그 방향이 시간의 방향이라는 것인데 이는 현상과 설명이 뒤바뀐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과거에 일은 이미 벌어졌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나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만 미래에 대해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서 신내림을 받아야 할 노릇이다. 시공간을 식빵 덩어리로 비교하는 것은 과거의 시공간에 대해서는 정확한 비유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비유가 미래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이런 의심은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인지의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과연 시간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지금'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라는 면에서 과거와 미래와는 성격이 좀 다르고 과거와 미래를 나누는 기준이면서 사람에게는 과거나 미래의 일순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어쩌면 가장 중요하면서 특이한 시간의 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슈레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시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인슈타인도 믿지 못한 사실이지만 소립자는 동시에 여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동전 던지기에 비유하자면 동전은 던져진 후 앞뒷면이 밝혀지기까지 앞면과 뒷면의 상태를 확률적으로 반반씩 유지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후에 앞뒷면 중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전의 경우 사실은 한 시점에 하나의 상태를 갖는다. 앞뒷면을 교대로 반복하며 돌다가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는 것인데 이를 동전이 공중에 있을 때는 확률적으로 앞뒷면이 각각 50%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정말 50%의 확률을 갖는 것은 아니며 던져진 이상 이미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는 정해져 있다. 반면에 소립자는 실제로 확률적으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해하기 정말 어려운 개념이지만 이는 벨의 정리의 실험적 검증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확인되었고 이를 반증하는 증거는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소립자의 상태를 관찰하는 순간 소립자는 하나의 상태로 정해지게 된다.

5.

슈레딩거의 사고 실험은 이런 기이한 소립자의 행태를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거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시도이다. 예를 들어 뚜껑을 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안을 관찰할 수 없는 상자 안에 원자가 있고 이 원자가 10분 내에 방사선 붕괴를 통해 상태가 바뀔 확률이 50%라고 하자. 10분 후에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원자가 붕괴했는지 안했는지를 알 수 있기 하지만 열기 전까지는 원자는 두 가지 상태 즉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를 동시에 유지한다. 기이한 일이지만 이는 사실로 밝혀진지 오래다. 만약 이 상자에 원자와 함께 원자가 붕괴하면 독가스를 내뿜는 기계와 고양이를 함께 넣는다면 어떨까? 상자를 닫고 10분 후에 뚜껑을 열면 원자는 붕괴했거나 안했거나 둘 중의 하나이 상태일 테고 그에 따라 고양이도 죽거나 안 죽거나 둘 중 하나의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뚜껑을 열지 않은 10분 동안 고양이의 상태는 어땠을까? 원자는 붕괴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를 모두 유지하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고양이도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상태를 모두 유지하게 된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상태이지만 양자역학의 논리를 그대로 확장하면 관찰되지 않는 동안에 대해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10분 후에 상자를 여는 순간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우리는 이를 통해 10분 동안의 상태를 정확히 유추할 수 있다. 만약 원자가 붕괴하지 않고 고양이가 살아 있다면 10분 내내 고양이는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만약 원자가 붕괴해서 고양이가 죽어 있다면 고양이의 체온이나 기타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정확히 언제 원자가 붕괴했는지 알 수 있다. 우주에서 정보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술 먹고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편지를 썼다가 아침에 쓴 글이 부끄러워 그 편지를 불에 태워버렸다 해도 당신이 쓴 글의 내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태운 재와 그을음, 연기, 공기 상태를 자세히 분석하면 당신이 쓴 글의 내용을 복구할 수 있다. 정보가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은 레너드 쥐스킨트와 스티븐 호킹이 벌인 블랙홀에 대한 논쟁에서도 중요한 논리의 기반이 되었다. 물론 사람이 이런 정보들을 모두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인 기술로는 불가능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고 슈레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사고실험에서는 당연히 가능하다.

이렇게 10분 동안의 역사는 철저히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고양이가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는 관찰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뚜껑을 덮은 상자를 밖에서는 관찰할 수 없지만 독가스를 방출하는 기계는 원자의 붕괴여부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이 기계가 이미 관찰자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즉 원자는 양자역학적 확률로 존재했었지만 어딘가에 자신의 상태에 대한 족적을 남기는 순간 이미 확률로 존재하지 않고 결정된 상태를 갖는 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뚜껑을 닫은 10분 동안에도 이미 관찰이 이루어진 셈이고 원자, 그리고 고양이도 명확하게 하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하지만 그 기계를 관찰자로 볼 수 없다면 좀 더 신기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정말 10분 동안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10분 동안 실제로 고양이는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하지만 10분 후에 뚜껑을 여는 순간 고양이의 그 때 상태 뿐 아니라 지난 10분 동안의 상태가 결정되게 된다. 즉 10분 동안의 역사가 뚜껑을 여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미래에 결정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소립자의 수준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실험적으로도 여러 번 관측되었다.

이러한 성질이 거시적인 수준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그대로 확장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답은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많은 시사점을 보여준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한 순간은 지난 순간에 의해 철저히 결정된다. 즉 하나의 순간이 다음 순간을 결정하긴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의 관점일 뿐이고 현재의 순간이 미래의 어떤 순간을 결정한다고 지금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6.

측정이라는 문제는 아인슈타인도 납득하지 못한 걸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행우주와 같은 무리한 이론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측정이라는 문제는 앞으로도 상식적인 수준의 설명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긴 해도 측정의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가 명확하게 갈린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시공간은 앞의 그림처럼 식빵이나 필름으로 비유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재 시점까지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시간은 아직 식빵 조각 하나로 고정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리차드 뮬러는 '지금'이라는 책에서 우주 공간이 확장되고 있듯이 시간도 확장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거시적인 수준까지 논리적으로 확장할 수는 있을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우리는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킨다고 얘기하지만 어쩌면 결과가 원인을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친구를 밀어서 친구가 넘어졌다는 말보다는 그냥 '친구가 넘어질 만한 행동을 내가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수도 있다. 친구가 넘어져야만 내가 한 행동이 친구가 넘어진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원인이란 결과가 발생한 후에야 원인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나의 의도나 의지, 나라는 존재의 주체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이상국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12, 2016년 12월, 이상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아포리아 칼럼
  • 칼럼니스트
  • 아포리아칼럼

월간 베스트 게시물

공지사항
  • 1 아포리아 북리뷰(Aporia Review of Books)
  • 2 궁금하신 사항은 언제든지 문의하여 주시기 바…
이용약관| 개인정보 취급방침| 사이트맵

Copyright (c) 2013 APORIA All rights reserved - www.apor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