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중국의 철학자 가운데 천지아잉(陈嘉映) 교수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存在与时间]》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의 연구는 사실상 분석 철학, 특히 일상언어학파에 편중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이치의 설명[說理], 그 자신이 사용한 말로 하면 “이치의 논변(論理)” 혹은 “이치의 궁구(窮理)”에 치중한다. 하지만 이처럼 이치를 설명하는 그의 작품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면서, 학술적인 문장의 난해함이나 딱딱함이 전혀 없는 독특한 이론 산문의 풍격을 보여준다. 문장은 친절하고 명확하며, 사상적인 깊이에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간혹 우스개로 이러한 풍격을 지아잉 산문풍이라고 부른다.
2015년, 천지아잉은 윤리학 서적을 출판하였는데, 그 제목은 《무엇이 좋은 삶인가[何为良好生活:行之于途而应于心]》이다. 이 책은 언제나처럼 이론 산문의 풍격을 보여주며, 윤리학의 문제에 관한 천지아잉의 집중적인 사유를 보여준다. 책에서는 도덕과 윤리의 구별, 공리주의[功效主义](보통 功利主义로 번역), 사실과 가치의 구분, 이론과 실천의 간극, 앎[知]과 실천[行]의 관계, 쾌락과 행복, 성선(性善)과 성악(性惡), 그리고 개별과 보편의 관계에 대해 논의한다. 각각의 문제들은 모두 윤리학, 나아가서는 철학 자체의 근본적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지아잉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윤리학을 담론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 관점을 의식적으로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사회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1) 바꿔 말하면,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없이는 윤리와 윤리학 또한 논의할 길이 없다. 이는 윤리와 윤리학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개체와 그 상호관계로부터 벗어난다면, 사회생활 또한 공허한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천지아잉은 윤리학의 개별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물론 용어에 있어서 그는 개별적 특수성[個殊性]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윤리학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사회생활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윤리학의 앎은 내가 포함된 앎[有我之知]”(2) 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렇게 개별적인 내가 포함된 앎을 단지 하나의 구체적인 “나”에게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개별적인 나는, 총체적인 측면에서, 사실상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나를 가리킨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바로 사람다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분리불가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3) 이것은 윤리학의 주요한 문제이다.
윤리학이 사람다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한, 그것은 자연과학과 구별된다. 윤리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며, 천지아잉은 그것이 물리학과 같은 부류의 이론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4) 이 점에 있어서 천지아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계승하면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경계를 강조한다. 그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관점에도 동의하면서, 철학이 결코 실천을 이끌어내는 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천지아잉은 실천이 이론의 청사진에 따라 실행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시종일관 거부한다.(5) 어떤 의미에서, 천지아잉의 이러한 입장은 사실상 버크의 보수주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한 사람의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사람다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일종의 실천이다.
만약 윤리적 행위가 무엇보다 먼저 일종의 실천이고, 뿐만 아니라 이론을 준칙으로 삼지 않는다면, 이러한 실천은 어디로부터 표준을 얻을 수 있는가? 덕성의 실천에 있어서 독서와 수업은 모두 주된 요소가 아니며, “이치의 설명[說理]” 또한 한계를 지닌다.(6) 그렇다면 대체 어떤 요소가 실천을 결정할 때 그것이 비로소 좋은 실천이 되는가? 여기에서 천지아잉은 전범(典範)에 관한 셸러(Max Scheler)의 사상을 인용한다. 실천의 표준은 이론과 이치의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수하고 걸출한 실천가에게 있다. 우수하고도 걸출한 실천가는 바로 실천이 존숭해야 할 전범이자 본받아야 할 권위이다.(7) 실천은 주로 “암묵지”의 방식으로 곁에 있는 전범을 학습함으로써 덕성을 배양한다. 이러한 학습방식의 전제는 하나의 업행(業行/业行, 천지아잉은 “业行”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에 대한 열정과 해당 업행의 권위에 대한 존숭이다. 덕성실천의 전승은 유덕자의 권위와 전범으로서의 역할에 근거한다.
천지아잉은 “덕이 있는 사람” 혹은 “전범”에게 있어서 “사실과 당위”는 조화로운 일체를 이룬다고 지적한다.(8) 이렇게 보면,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실과 당위”는 서로 엇갈린 분열 상태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덕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사실과 당위를 봉합하는가? 천지아잉은 의외의 언뜻 보기에 대답을 내어놓는다. 그는 “자연상태”로 “사실과 당위의 화합 지점”을 묘사한다.(9) 홉스의 사유에 따르면, 자연상태는 극복되어야 할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직 선악의 구분이 없다. 그러므로 인류생활은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 정치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루소의 사유에 따르면, 사회상태는 일종의 타락상태이며, 인류생활은 순수한 자연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천지아잉이 말한 자연상태는 바로 전통적인 의미의 이성적 자연상태에 가깝다. 자연 또는 천성은 거칠거나 단순한 본능적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배움과 익힘을 통해 덕성을 배양함으로써 성취된 자연을 가리킨다.(10) 이러한 자연은 일종의 덕성(德性)으로서 자연이며, 이성적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 이러한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볼 수 있으며, 중국에서는 공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천지아잉은 한 번도 이러한 경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그의 윤리학적 입장은 일정 정도 아리스토텔레스(매킨타이어를 경유하여)와 공자의 사상을 융합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전범 또는 권위는 전통의 안정성을 구축하고 보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천지아잉 또한 어쩌면 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종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물론 이 문제에 있어서 천지아잉은 단지 전범의 본보기 역할만을 강조하며, 권위의 언어적 전달 작용은 홀시한다. 사실 권위의 언어적 전달과 본보기로서의 전범은, 실제로 덕성의 실천에 대해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자신의 사유와 관련하여 천지아잉은 한 가지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그는 유가전통을 예로 들어 덕성의 배양과 전통의 구축에 있어서 전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또 중국의 덕치전통에서 “허위적 도덕주의”을 배척하면서, 이러한 도덕이념에 대한 분석을 하나의 “막중한 임무”로 귀결지은 채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11)
비록 천지아잉은 윤리학이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론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만, 윤리학이 일종의 이치를 논하는 활동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윤리학이 윤리 실천 경험의 전문적 발전이며, 그것은 “실천지에 기초한 논리와 궁리”(12)라고 본다. 이러한 논리활동은 “논거로서의 사실”에 입각하며, “세밀한 묘사와 분석에 진력한다.”(13) 비록 논리활동으로서의 윤리학이 윤리실천의 법칙이나 진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윤리실천과 결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우회” 또는 “간접”의 방식으로 윤리생활에 관여한다. 이러한 우회나 간접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 윤리학은 “윤리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세속적 이해를 바꾸는 것”을 연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좋은 윤리학-정치학”은 “실천 속의 분명한 이치를 촉진”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이로부터 “실천의 품질이 제고”(14)된다. 여기서 천지아잉은 “윤리학-정치학” 앞에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인다. 어떤 경우에 천지아잉은 실천의 목적으로서 “좋은 실천 자체”를 언급한다. 이렇게 이 책의 제목으로 돌아온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용어에 있어서 천지아잉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eudaimonia로 좋은 삶을 풀이하며, 또는 역으로, 좋은 삶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eudaimonia를 번역한다. 이러한 의미의 좋은 삶은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외재적인 풍족함과 내재적인 선량함을 포괄하는)과 결코 같지 않으며, “품격과 영성, 역할의 수행”(15) 에 보다 더 관련된다. 문제는 어떠한 “품격과 영성, 그리고 역할의 수행”이 진정으로 좋은 삶을 구현하는가 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측면에서 좋은 삶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일 수 있으며, 이익을 도모하는 삶일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이해는 각각 쾌락주의(hedonism)와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입장을 보여준다. 좋은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두 가지 이해 모두에 대해 천지아잉은 확실히 만족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양자 사이에서 분명 쾌락의 요소를 더 중시한다. 바꿔 말하면, 좋은 삶은 결국 일정한 의미의 쾌락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이익은 좋은 삶의 핵심적 요소와 관련이 없다. 비록 천지아잉은 선(善)을 단순히 쾌락과 등치시키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한 의미에서 쾌락으로 좋은 삶을 해석한다.
천지아잉은 쾌락의 서로 다른 측면을 구분한다. 어떤 경우에 그는 정서적 즐거움과 지의(志意)의 즐거움 (16)을 비교하여 논의한다. 경우에 따라 그는 지의의 즐거움과 탐닉의 즐거움을 마주 세운다. 또 어떤 경우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하여 군자의 즐거움과 소인의 즐거움을 구분한다. 군자의 즐거움은 덕행의 즐거움이고, 소인의 즐거움은 즐거움을 위한 즐거움이다. 세 가지 구분에 근거하여 천지아잉이 이해하는 특정한 의미의 쾌락을 분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좋은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쾌락이다. 정서적 즐거움과 지의의 즐거움 사이의 구별은 주로 시간적인 순간성과 지속성에 있다. 정서적 즐거움은 갑자기 찾아와서 갑자기 떠나가는 쾌락이며, 지의의 즐거움은 “일 가운데 융화된 쾌락”이다. 예를 들어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 그것은 영속적인 쾌락이다.(17) 지의의 즐거움과 탐닉의 즐거움은, 주로 전자가 건전한 발전적 쾌락이고, 후자가 병적인 퇴행적 쾌락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지아잉은 재차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인용한다. 쾌락의 건전함과 불건전함, 혹은 쾌락의 좋고 나쁨은 주로 쾌락과 연계된 활동 자체가 건전하고 선한 것인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고상한 활동이 가져다 준 쾌락은 좋은 것, 건전한 것이고, 비루한 활동이 가져다 준 쾌락은 나쁜 것, 불건전한 것이다. 이로부터 세 번째 종류의 구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군자는 “고상한 일에 전념하고, 이성에 복종하며”, “덕행의 즐거움”과 덕성의 실천에 완전히 심취해있다.(18)
이러한 지의의 즐거움은 본연의 의미에서의 쾌락이기도 한다. 본연의 의미에서 쾌락은 훌륭한 일이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 영속적이고 발전적이며, 건전하고 고상한 쾌락이다.(19)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천지아잉은 공리주의자가 선과 쾌락을 등치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도 일정 부분 선이 바로 특정한 의미에서의 쾌락, 곧 지의의 즐거움, 군자의 즐거움, 그리고 덕행의 즐거움과 같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 쾌락, 선, 자연, 이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로 모이게 된다. 지의의 즐거움이 곧 선이며, 자연본성에 이르는 것이다. 선이 바로 자연이 향하는 바이고, 본성의 완성이다.(20) 이렇게 보면, 쾌락과 선, 자연의 삼자는 일체를 이루며, 윤리생활의 목적이자, 윤리학의 논리적 근거이다. 이 점에 있어서 비록 천지아잉은 논술 과정에서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암시하는 바가 있다. 이 세 가지가 합일되어야만 좋은 삶의 실천이라 칭할 수 있으며, 이 세 가지의 합일에 대한 궁리가 있어야 좋은 삶의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삶에 관한 천지아잉의 논술은 제임스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했던 인성의 두 가지 구분을 떠올리게 한다. 한 종류의 사람은 항상 천부적으로 발전적이며, 즐겁고, 건전한 방향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따스함을 누린다.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퇴행적이고, 비관적이며, 병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죄악과 세상의 고통을 연민한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이성의 철학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것이 속죄의 종교다. 이러한 측면에서 말하자면, 천지아잉이 논술한 좋은 삶은 속죄의 종교와 그 의미에 있어서 거리가 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술한 덕성 윤리 생활, 공자가 구상한 군자의 이상이 바로 이와 같은 좋은 삶을 구현한 것이다.(21)
좋은 삶은, 그것이 군자의 덕인 이상, 자연히 일종의 목적론적인 윤리생활이다. 좋은 삶의 달성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의 목적이며, 동시에 사람다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당위이다. 바꿔 말하면, 쾌락과, 선, 자연을 하나로 녹여 낸 좋은 삶은, 모든 사람다운 삶의 당위적 목적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지아잉이 논술한 좋은 삶은, 일정한 규범적 의의를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덕성생활이든, 공자적인 의미에서 군자의 바람이든, 모두 분명히 후세에 모범이 된다는 규범적 의미가 있다. 의문이 드는 점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천지아잉이 좋은 삶의 규범적 의의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좋은 삶이라는 이념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천지아잉이 생각하는 이른바 역사성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오늘날과 옛날 사람들의 좋은 삶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라진 것이다. 천지아잉이 생각하는 다양성이란,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좋은 삶의 유일한 이상이 있었던 적은 없다”는 것이다.(22) 좋은 삶의 다양성을 견지하는 이유는, 천지아잉이 모든 특수성을 뛰어 넘는 보편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며, 그가 서로 다른 가치 추구 사이의 “영원한 대립 내지 충돌”(23) 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천지아잉은 전체 책의 끝부분에서 좋은 삶의 역사성과 다양성 내지 개별성을 끌어들이는데, 내가 보기에는 성공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전체 책의 종지를 부정하게 된다.
좋은 삶이 역사성과 다양성, 개별성을 지닌다면, 쾌락과 선, 자연이 하나가 된 좋은 삶은 사람다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공통의 목적으로 표방할 수 없다. 천지아잉 자신의 말로 하자면, 그것은 기껏해야 특정한 문화나 인종 집단이 애호하고 선양하는 문화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천지아잉도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좋은 삶이 “바람과 같은 군자의 덕”이지, 허화이홍(何怀宏)이 말한 “풀과 같은 소인의 덕”을 보여주는 최저윤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24) 하지만 문화가치의 역사성과 다양성, 개별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더 이상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지 않는 현대 철학 사상이며, 동시에 “소인의 덕”을 고취하는 결과가 된다. 천지아잉은 한편으로 풀과 같은 소인의 덕의 세계에 고인이 추구했던 바람과 같은 군자의 덕을 이루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풀과 같은 소인의 덕인 현대적 가치관을 받아들인다. 이 문제에 있어서 고인의 사유는 오히려 일이관지하다. 군자의 덕은 소인의 덕에 대해 전범이자 본보기지만, 그것은 여전히 군자의 덕이지 소인의 덕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덕은 더더욱 아니다. 좋은 윤리학 또한 군자에 관한 학문이지 소인에 관한 학문이 아니다.
<주>
(1) 陈嘉映:《何为良好生活:行之于途而应于心》,上海:上海文艺出版社,2015年,第5页。
(2)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75页。
(3)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9、74页。
(4)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84、87、90页。
(5)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5、164、166页。
(6)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72页。
(7)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72、174页。
(8)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52页。
(9)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62页。
(10)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54页。
(11)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15-116、174页。
(12)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64-165页。
(13)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84、90页。
(14)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67页。
(15)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03页。
(16) [역자 주] ‘지의(志意)의 즐거움’은 사전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라, 천지아잉이 만들어낸 말이다. 이는 본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행위에 완전하게 융합된 쾌락을 가리킨다.
(17)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90页。
(18)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94、201页。
(19)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198-199页。
(20)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36、256页。
(21)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11、261页。
(22)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61页。
(23)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92页。
(24) 陈嘉映:《何为良好生活》,第268-269页。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중국, 중국인]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0, 2015년 10월, 천지앤홍(陈建洪), 중국 난카이 대학(南开大学) 철학과 교수; 이수현 옮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